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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기존 [말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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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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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호랑이가 올림픽을 개최하던 시절, 대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농촌활동을 떠났다. 고추도 따고 김도 매고 도랑도 파며 일손을 도왔다. 어린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청년들과 토론을 하며 마을잔치도 열었다.



민폐를 끼칠까 봐 식사 대접을 절대로 받지 않는 게 원칙이었는데, 인심이 어디 그렇던가. 이틀만 지나면 서로 ‘누구네 집에서 엄청 맛있는 거 얻어먹었다’며 자랑하기 일쑤. 한데, 밥동냥은 고학년보다 1학년이 더 잘했다. 고학년일수록 쫄쫄 굶었고 1학년은 배불리 먹고 왔다. 이유인즉슨, 4학년은 배운 티를 내느라 “기존의 밥 일정 부분 있으면 주십시오”라고 하여 농민들이 알아듣지 못해 밥을 주지 않았다. 1학년은 “엄니, 식은 밥 남았으면 좀 주세요”라며 아양을 떨어 잘 얻어먹었다나.



식은 밥 정도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기존의 것’은 콘크리트처럼 딱딱하다. 제도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잡아끌어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바꾸기가 어렵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힌다. 뿌리 깊고, 처음부터 있었던 거 같고, 변경 불가능하다. 변경하면 변경하기 전보다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것 같다. 그러니 ‘기존’을 넘어서는 일은 어렵다. 9할 이상 실패한다.



요즘 나는 대학의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꾸는 데 마음을 쏟고 있는데, 반대와 저항이 만만찮다. 교실을 경쟁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광장으로 바꾸려면, 교실의 질서를 바꿔야 하는데, 새로운 교육은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데, 쉽지가 않다.



우리 꿈이 모종의 변화라면, 그것은 ‘기존’과의 싸움이다. 아직 없는 것을 상상하거나, 사라진 것을 복원하면서,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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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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