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정동칼럼]대한민국, 괜찮지 않습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대한민국, 정말 괜찮은 겁니까”라고 운을 떼면서, “앞으로 시설투자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등이 반도체업계 숙제”라면서 “(해외)보조금이 많은 것은 시스템 미비나 비싼 인건비 등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최 회장 스타일대로 진솔한 답변이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시설투자를 하는 것이 한·미 간 보조금 차이 때문이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인 보수언론들이 좀 머쓱해질 것 같다. 사실 2021년에 미국반도체산업협회가 첨단 시스템 반도체 공장을 짓고 10년간 운영했을 때 드는 총비용을 미국에서 100원이라고 봤을 때, 한국·대만은 78원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반도체 시설투자를 하는 삼성전자는 시설투자비의 15% 정도의 보조금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게 된다. 보조금을 안 받더라도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게 더 경제적이다.

최 회장은 그러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국내 시설투자를 미루면서 미국에 투자는 확대하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지난 4월 미국 상무부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테일러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을 당초 계획보다 두 배 이상 키워 총 450억달러(약 62조3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또한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달러(약 5조4000억원)를 들여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생산시설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해,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짓겠다고 밝혔던 공장 4곳은 계획 수립 후 6년째 착공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SK하이닉스 용인 공장에 대해서는 전력 공급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다. 그러나 2050년까지 삼성전자의 대규모 시스템 반도체 공장 투자에 필요한 10GW 이상의 전력 공급 계획은 제대로 제시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존스홉킨스대학의 탄소중립 산업정책연구소는 지난 4월에 발표한 브리프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녹색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으며, 재생에너지를 확보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한국이 최첨단 반도체 시설투자를 유치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이 브리프는 또한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를 인용해, 새로운 반도체 생산시설의 입지 결정에 재생에너지 접근성이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재생에너지 접근성이 중요함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서 강화되고 있는 RE100 요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글로벌 서버 1위인 델테크놀로지스와 MS는 2030년까지 반도체 등 부품·소재 공급자들이 탄소 배출량을 각각 45%와 50% 감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애플과 아마존웹서비스(AWS)는 각각 2030년, 2040년까지 부품·소재 공급자들이 RE100을 달성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인 ASML은 2040년까지 고객사들이 RE100을 달성해야 장비를 판매하겠다고 공언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설비투자 행보는 대만의 TSMC와 비교된다. TSMC도 미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투자한다. 그러나 TSMC는 대만에서 최첨단 녹색 반도체를 꾸준히 생산하는 게 우선이며, 미국·일본 등에 대한 투자는 대만 내 부족한 재생에너지 공급에 보완적 성격임을 분명히 했다. 2023년 9월 TSMC는 대만 공장에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60% 사용하고 2040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TSMC는 ARK 전력과 20년 장기 계약으로 2만GWh 태양광 전력을 확보했으며, 덴마크 오르스테드로부터 대만해협에 설치한 해상풍력발전 1GW를 구매하고, 자체 공장에 태양광 발전 패널도 설치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이 이대로 괜찮을지는 최태원 회장이 더 잘 알 듯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RE100 이행을 위한 대책은 외면하면서 첨단 반도체 시설을 미국에 건설하고 생산할 요량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첨단 반도체 공장을 한국에 더 이상 짓지 않기 시작하면,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를 회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 기업이 국내에 첨단 녹색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구체적 계획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RE100 정책을 도출하는 것이 제22대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 산업 등을 유치할 RE100 산업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재생에너지 생산 목표치 및 입지 그리고 분산형 전력망 도입을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녹색산업정책과 에너지믹스정책의 조합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향신문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심 변화를 지도로 확인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