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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경사노위에서 노동시장 딜레마 풀자[기고/김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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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덕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상임위원


기술혁명으로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져 간다. 기업은 생존을 위해 생산방식, 생산관리, 거버넌스까지 통째로 바꿔야만 한다. 하지만 노사관계가 협력적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조직 내 변화가 어려우면 기업은 아웃소싱을 선택하게 된다. 노동규제와 노사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다. 당연한 결과로 내부 노동시장은 줄어들고 외부 노동시장은 팽창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이른바 12 대 88의 사회이다. 두 노동시장이 분단되어 노동이동의 통로도 막혔다.

이런 상황에선 노동정책들이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법정 정년 연장이 대표적이다. 대기업 정규직에겐 이보다 좋은 일이 없다. 이미 노조의 교섭력으로 정년이 연장되는 곳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채용문이 더 좁아질 청년들의 심정은 어떨지 모르겠다. 인력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은 정년이 무의미하다.

근로시간 규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연장근로를 포함하여 주 52시간 이상 근로는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취지는 좋으나 문제는 획일적이라는 데 있다. 초격차 기술을 다루는 반도체 연구원이 주 연장근로 한도인 12시간이 넘었다고 진행하던 연구를 중단할 수 있을까. 획일적 규제는 근로자 간 격차도 벌린다. 대기업 정규직은 여가 시간을 늘려 가지만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줄어든 소득을 메우기 위해 투잡, N잡을 뛰는 것이 현실이다.

노사관계는 국가 경제를 좌우한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1960년대 강한 노조의 임금 인상 압박을 피해 제조공장을 동아시아로 옮겼다. 우리나라도 그 반사이익을 톡톡히 봤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정규직 근로자만 8만 명이다. 미국은 이제야 64억 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하며 삼성전자의 첨단반도체 공장을 다시 텍사스에 유치했다. 그곳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만 2만 개가 넘는다.

스웨덴 말뫼는 2002년 코쿰스조선소크레인이 단돈 1크로나에 팔리는 등 도시 소멸의 위기를 맞았다.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3만 명이 실직했다. 그랬던 도시가 지금은 메디콘밸리가 있는 친환경 현대도시로 변모했다. 말뫼의 눈물이 미소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노사의 협력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올 2월 6일 노사정은 현 위기 상황에 대응하고자 세 개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회적 대화를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논의에 참여할 위원들을 선정하고 발족일도 정했지만 연기되고 말았다. 한국노총은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경사노위에 참여하는 유일한 단체다. 강한 책임감과 헌신을 보여야 한다. 지금은 과거 산업시대의 일차원적인 노사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 간, 노동자 간에도 다중의 이해관계와 갈등이 존재한다. 한국노총이 88%의 목소리를 저버린다면 노동시장의 딜레마는 계속되고 사회적 대화에 거는 기대도 사라질 것이다.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892년 독일의 한 잡지에 오리-토끼 그림이 실렸다. 그림의 왼쪽을 보는 사람은 오리라 하고, 오른쪽을 보는 사람은 토끼라 한다. 대상은 그대로인데 보는 방향과 해석에 따라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노사관계가 그렇다.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왼쪽을 보다가도 대화를 통해 오른쪽을 볼 수 있는 관계가 구축되기를 바란다.

김덕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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