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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 (화)

[역사와 현실]‘10만 양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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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가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이 주장대로 조선이 미리 병력을 길렀다면 임진왜란 같은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한국과 일본 관계가 대체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도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주요 국가 간의 경쟁은 직접적 무력 충돌보다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더 치열하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 전쟁의 주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전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이제는 한 국가의 기술 역량이 그 국가의 세계적 지위를 크고 빠르게 바꾼다.

‘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유럽’이 근래 주목을 끌었다. 2008년 무렵만 해도 유럽 전체와 미국의 경제 규모나 개인 소득 수준이 거의 비슷했는데, 이제는 크게 달라졌다. 2022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14년 만에 유럽의 경제력은 미국의 65% 수준에 불과하게 되었다. 개인들 소득 차이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런 차이를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이유로 미국의 세계적 기술 기업들의 등장을 든다. 구글의 검색엔진 시장 점유율은 미국에서는 88%인데 유럽에서는 92%로 더 높다. 이제 유럽은 미국의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기술 부문에서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은 그 패권을 잃지 않으려고 국가적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2009년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STEM 확대 정책을 선언했다. STEM이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을 말한다. 그는 2011년부터 2021년까지 10만명의 신규 수학, 과학 교사를 양성하겠다고 선언했고, 오바마 재단은 2021년 11월 목표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산업정책을 이끄는 바이든 행정부 상무장관 지나 러몬도는 향후 미국 정부가 반도체 인력을 두 배로 늘릴 것이고, 10만명의 신규 기술자를 양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한 번의 ‘10만 양병’이다.

대학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졸업생들이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가이리라. 졸업생들이 거두는 성과의 총합이 결국 해당 대학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할 것이다. 대학 당국은 투자 대비 수익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미국 대학에서 영문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 같은 전통적 인문학 분야가 축소되고 기술 중심의 이과 분야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이런 사회적 요구나 압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이제 시장이 지구적으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회수(淮水) 남쪽의 귤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기술 의존적 사회가 되는 흐름은 세계 공통적이다. 그런데 미국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중시하는 반면 한국은 의대 입학정원을 얼마로 하느냐에 온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의대 입학 열풍이 다른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다른 이과 분야까지 위축시키는 형편이다.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한국은 국제 교류와 무역으로 국력을 키웠다. 외국인이 한국의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만 말하면 의료분야는 내수산업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정부도 기술 패권 시대에 아주 대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 조정도 일본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는 했다. 그에 따라 몇 가지 대비책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런 대비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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