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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혐오도 폭력도, ‘공정’인가요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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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2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 회원들이 2022년 5월14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 도로에서 2022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기념대회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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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이 공개서한에 서명하면 귀하의 성명, 직책, 소속이 공개된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다음에는 또렷하게 공포감이 몰려왔다. 나는 물리적으로 해코지를 당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고맙게도 나를 지키겠다고 친구들이 달려왔지만, 언제 또 위협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요즘 미국에서는 극우 단체가 이른바 “급진적” 교수들의 사진과 프로필을 유포하고 있다. ‘프로페서 와치리스트’(Professor Watchlist)를 검색하면 누구나 그 명단을 볼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공격할 수 있도록 공식적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들은 “급진적”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유색인종, 퀴어,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이 주로 공격 대상이 된다. 우리 학교에서도 이 명단에 올라간 교수들 중 두명이나 테러를 당했다. 한명은 퀴어라는 이유로, 한명은 트랜스젠더 인권을 옹호한다는 이유였다. 이런저런 무서운 경험 때문이었을까. 요즘처럼 백래시가 심각한 시대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다.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비단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소수자’이거나 ‘비정상’으로 묶이는 사람들을 향한 혐오 범죄가 늘어가는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미국의 수많은 학자들과 함께 나는 전미대학체육협회(NCAA)에 보내는 공개서한에 서명했다. 놀랍게도 이 협회는 트랜스젠더 여학생의 참여를 정책적으로 원천봉쇄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 정책이 도입되면 인기 종목이든 비인기 종목이든, 트랜스젠더 여학생들이 선수로 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미국에서 대학 스포츠는 엄청난 사업이다. 이른바 ‘엘리트 체육’ 대학들은 전국에 생중계되는 라이벌전을 펼치고, 전액 장학금을 주면서 유망주들을 영입하고, 지역 주민들과 동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거대한 수익을 올린다. 동시에 스포츠는 그저 시장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선수들에게 스포츠는 삶 그 자체이자 평생의 꿈이고, 또한 스스로를 향한 사랑과 긍지이기도 하다. 차별적 정책 때문에 아예 기회를 박탈당할 학생들을 생각하면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경기에 참여하면 “진짜 여성”에게 불리해진다고 믿는다. 퀴어/트랜스 혐오 탓인지, 쉽게 화젯거리가 되는 극소수의 사례 탓인지, 사람들은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트랜스젠더 선수와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한다. 그토록 편리하게 사람들이 ‘선택적 무지’를 유지하는 덕분에 약자와 소수자들은 매일같이 부당한 폭력을 감당해야 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유리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으며, 지금까지 생물학도 의학도 이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 최근의 문헌 조사에서는 관련 연구들이 극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방법론적으로 오류가 많다는 점도 밝혀졌다. 또한 미국 고등학교의 경우 트랜스젠더의 참여를 허용한 학교에서 (생물학적) 여성 선수들이 이탈하지 않았으며, 지방정부 차원에서 트랜스젠더의 참여를 보장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오히려 여학생들의 스포츠 참여가 크게 증가했다. 다양성과 포용에 기반한 정책이 결국 모두의 참여를 독려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스포츠는 오랫동안 여성과 흑인을 공식적으로 차별해왔다. 그러나 그토록 서열화된 영역에서도 변화는 분명했고 트랜스젠더 차별도 언젠가는 지나간 역사가 될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기득권을 버리는 것도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가 배운 차별과 구별짓기의 습속을 탈피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차이를 이해하는 방법도, 평등을 추구하는 방법도, 다양한 경로를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다. 1990년 5월17일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것을 기념해 제정되었다. 이처럼 동성애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34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어떤 미래에는 퀴어를 차별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 역시 사라질 것이고, “진짜 젠더”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도 사라질 것이다. 5월17일을 기념해 올해도 집회와 행진이 이어진다. 다 함께 거리로 나와 혐오 없는 세상을 외치자. 어쩌면 그날 미래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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