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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이승훈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식품 로스(loss)’ 줄이기 나선 日 업계, 납품 기한 늘리고 유통 기한은 연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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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유통·식품업계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분야는 ‘식품 로스’다. 먹지 못하는 식품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데도 버려지는 식품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연간 폐기되는 식품 중에서 ‘식품 로스’에 해당하는 것은 대략 4분의 1에 달한다. 매일 한 명이 차 한 잔 분량의 쌀을 버리고 있을 정도다. 이를 위한 처리 비용도 연간 2조엔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 유통업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대형할인점 이토요카도 등을 운영하는 세븐앤아이홀딩스는 최근 가공식품에 대한 납품규칙을 완화하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식품 제조업체 등이 유통회사에 제품을 납품할 때 불문율로 지키는 것이 ‘3분의 1 규칙’이다. 이는 제조업체가 정한 유통기한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물건을 납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선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자 취향을 반영해 1990년대부터 대부분의 유통사가 채택하고 있다.

‘3분의 1 규칙’을 적용하게 되면 유통기한이 넉 달이나 남은 라면도 판매가 불가능해진다. 유통기한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제조업체는 이를 폐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품 로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번에 세븐앤아이가 도입한 것은 이러한 ‘3분의 1 규칙’을 완화하는 것이다. 유통기한이 6개월 이상인 모든 가공식품을 대상으로 ‘2분의 1 규칙’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예를 든 라면 제품의 경우 한 달이나 더 유통이 가능해진다. 세븐앤아이가 납품기한 완화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AI의 활용으로 제품 발주에 정확도가 올라가면서 과잉 발주를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납품 단계부터 유통기한이 짧아져도 식품 폐기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세븐일레븐과 함께 3대 편의점으로 통하는 훼미리마트와 로손도 여기에 동참했다.

폐기식품 처리 비용 연간 2조엔
‘식품 로스’를 줄이기 위해 식품업계는 유통기한의 연월 표기도 바꾸고 있다. 제조일부터 유통기한까지의 기간이 3개월을 초과하는 상품의 경우 ‘연월일’ 대신 ‘연월’로만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통기한이 6개월인 상품의 경우 2024년 4월 1일에 제조한 상품과 4월 30일에 제조한 상품은 모두 ‘2024년 4월’로 표시가 된다. 이러면 4월 1일에 만들어진 제품은 상대적으로 ‘식품 로스’가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세븐앤아이는 자체 제조하는 프라이빗 브랜드(PB) 제품 70%가량의 유통기한을 ‘연월’로 바꾸었다. 마요네즈·케첩 브랜드로 유명한 큐피도 파스타 소스의 유통기한을 ‘연월’로 바꿔 최장 1개월 연장했다. 감자칩으로 유명한 고이케야도 4월부터 스낵 과자 상품의 유통기한을 ‘연월일’에서 ‘연월’로 바꾸기로 했다. ‘포테이토칩스’와 ‘프라이드 포테이토’ 등 감자를 원료로 하는 상품의 경우 제조일로부터 6개월이었던 유통기한을 아예 8개월로 늘렸다.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스콘’ 등의 스낵 제품은 기존 8개월에서 두 달 더 늘려 10개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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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케야의 인기 상품 감자칩


식품업체인 메이지도 지난 3월부터 부드러운 요구르트 맛 사탕인 ‘요글렛’과 ‘하이레몬’의 유통기한을 기존보다 3개월 연장해 12개월로 늘렸다. 상품 보존 시험을 통해 현재의 유통기한인 9개월을 넘기더라도 품질이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앞서 메이지는 2020년에 유통기한이 1년 인상인 가정용 상품 100종 이상을 ‘연월일’ 표시에서 ‘연월’ 표시로 전환했다.

‘2024년 문제’도 영향
‘식품 로스’의 문제 해결뿐 아니라 올해 4월부터 본격화되는 ‘2024년 문제’도 식품·유통업체의 유통기한 변화에 영향을 줬다. ‘2024년 문제’는 그동안 법정 초과근무(시간 외 근무) 시간 규제에서 예외를 적용받았던 의료·물류·건설 분야 종사자에 대한 근무 시간 규제가 4월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3개 분야에 대한 유예가 종료되면서 의사와 트럭 운전사는 연 960시간, 건설업 노동자에게는 연 720시간의 초과근무 시간 한도가 적용된다. 다만 의사의 경우 의료기관별로 노사 협의를 거친 뒤 지방자치단체에 연장을 신청하면 최대 연 1860시간까지 초과근무가 가능하다.

한국의 주52시간제와 비교할 때 훨씬 여유 있는 초과시간을 적용하는 일본이지만, 이것을 ‘문제’라고 부른 데에는 저출산 고령화로 만성화되는 인력난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유통업계가 크게 의존하는 트럭 운전사 수급이다. 전자상거래로 택배 취급 숫자가 2014년 이후 매년 증가하는 가운데, 자동차 운송업의 유효구인배율(구인수를 구직자 수로 나눈 값)은 지난해 2를 넘어섰다. 이는 운송업계가 원하는 인력의 절반밖에 인력을 구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 트럭 운전기사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인력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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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부터 요금을 인상한 일본 야마토 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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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최장 5년간 외국인 노동자의 취업 체류를 허용하는 분야에 운송 등을 추가해 인력 활용 폭을 넓히기로 했다. 또 올해 중 신도메이고속도로의 일정 구간을 완전 자율주행차로로 전환해 운전 시간을 줄이는 방법도 시도하기로 했다. 물류 문제 대응을 위해 기업들도 나섰다. 식품제조업체인 아지노모토와 하우스식품은 관동에서 관서로 이어지는 장거리 노선은 트럭 대신 열차로 제품을 운송하기로 했다. 또 홋카이도 지역의 경우 아지노모토를 포함한 6개 식품회사가 1개의 공동 물류창고를 운영하는 등 효율화에 나섰다. 릴레이 수송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기존에 1명의 운전사가 담당하던 1000㎞가 넘는 도쿄-후쿠오카 운송의 경우 중간 지점에서 운전사와 트럭을 바꾸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하루 12시간 일하는 운전자의 근로 시간이 2시간 정도 줄어들게 된다.

일본 내 식품 도매업체인 미쓰비시식품은 지난해 9월부터 트럭 내 빈 적재공간을 공유하는 물류 운송 네트워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 유통업체 라이프코퍼레이션과 야오코, 서밋, 마루에츠 등 4곳은 기존 납품일 하루 전까지 물량을 발주하는 체계에서, 납품일 6일 이전까지 발주 물량을 확정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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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문제로 관광상품 내용을 일부 변경한 하토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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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4호 (2024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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