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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구의 자랑거리가 2년만에 도시미관저해 주범?…강남구청의 옹색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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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에 사랑받던 ‘문정희 시인길’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경향신문

경기고 앞 언덕길. 2022년 4월 ‘문정희 시인길’로 조성돼 이를 알리는 팻말, 시비 등이 설치됐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박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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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고 앞에 있던 ‘문정희 시인길’은 녹지가 부족한 강남권에서 시민들에게 사랑받던 산책로였다. 소담하게 가꾼 나무와 화초, 문 시인의 작품을 수록한 시 패널들은 주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달 초 이 길이 사라졌다. 당사자인 문정희 시인도 이 사실을 몰랐고 사전 통보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최근 강남구청 홈페이지에는 문정희 시인길 복원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항의글이 다수 게재됐다. 한 주민은 “청담동 이사 후 가장 즐기며 거닐던 산책로가 사라졌다”며 “세금을 들여 만든 공공시설물을 왜 아무 이유없이 없앴냐”고 항의했다. 또 다른 주민은 “시인길을 걸으며 시 한 편씩 읽는 게 낙이었는데 그 아름다운 시들이 잡초처럼 뽑혀 나갔다. 적어도 주민들은그 이유나 사연 같은 건 알 권리가 있지 않냐”고 지적했다.

강남구청은 2022년 4월 서울 삼성동 경기고 앞 400m 구간에 시인의 작품 ‘서시’ ‘비망록’ ‘겨울 사랑’ 등 8편을 목재, 알루미늄판 등으로 제작해 설치하고 화초를 심어 산책로를 꾸몄다. 산책길 입구에는 ‘문정희 시인길’이라는 팻말을 설치하고, 문정희 시인과 주민들을 초청해 기념식도 개최했다. 당시 구청은 40여 년 강남에 거주한 세계적인 시인인 문정희 시인을 기리고 소비 중심의 강남 이미지를 쇄신한다는 취지에서 시인길을 만들고 이를 홍보했다. 하지만 강남구청 관계자는 “해당 길에 인공조형물이 많고 낡아 도시 미관을 저해한다는 판단에 따라 정비 차원에서 철거했다”고 말했다. 해당길이 조성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사유로 시인길을 없앴다는 것은 쉽게 납득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구청은 “돌로 만들어진 시비는 아직 남아 있으니 ‘문정희 시인길’을 완전히 폐지키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면서 “존치할지, 새로운 생태길을 조성할지 추후 검토할 예정”이라며 답변을 흐렸다.

구청은 ‘시인길’을 없애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문정희 시인에게 상의는 물론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문 시인은 “시인길이 없어진 줄 몰랐고 관련해서 연락받은 것도 없다”며 “처음에 설치한다고 했을 때도 극구 사양했지만 구청이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주민들과 시 몇 편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승낙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이기도 한 문 시인은 “한 쪽에서는 셰계에 한국문학을 알리려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작가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이런 일이 이뤄진 것에 대해 심히 당황스럽다”라고 털어놨다.

일각에서는 전임 구청장 흔적 지우기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복진경 강남구 의회 의원은 “강남구가 자연녹지가 적은 지역인데 돈 들여서 활용 가치가 높은 산책길을 만들어 놓았다가 철거했다. 예산 낭비의 행정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경향신문

2020년 신작을 내고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문정희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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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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