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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서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돌부처들의 절, ‘4대 관음성지’ 강화 보문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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㉘ 인천 강화군 보문사(普門寺)

.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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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와불전에 있는 대형 석조 불상. 누워있는 형태(와불)로, 보문사에는 유독 석재로 된 상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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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푸른물에 물새가 울면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말하라 강물이여 너만은 알리라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

대학시절, 5월이 돌아오면 친구들과 선술집에 모여 앉아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 ‘예성강’의 노랫말이다. 6·25때 국군 유격대가 전멸했던 멸악산 전투를 그린 1966년 개봉작 ‘여기 이 사람들이’의 주제가를 15년 후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빗대 가수 김원중이 개사했다.

황해남·북도를 가르는 예성강과 개성을 끼고 도는 임진강, 수도 서울을 가로지른 한강. 이 삼강(三江)은 강화도에서 합을 이룬다. 새하얀 이팝나무와 노란 금계국, 붉은 장미가 길가에서 반기는 5월 중순 서울을 출발해 김포를 지나 강화도에 들어서니 ‘예성강’ 노랫말이 떠오른다. 강화도를 통과해 석모대교를 건너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로 진입했다.

보문사는 다양하게 수식할 수 있다. 전등사, 정수사와 더불어 강화(군)의 3대 고찰로 꼽힌다. 국내 4대 관음 성지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서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4대 관음성지 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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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일주문과 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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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모두 바다 가까이 전망 좋은 자리에 들어선 절이다. 일출이나 일몰 즐기기에 제격이다. 먼 옛날 관세음보살이 인도 남부의 바닷가에 있는 ‘보타낙가산(山)’ 굴속에서 지냈는데, 그래서 이후의 관음성지들도 바다 근처에 지어졌는지 모르겠다.

오후 6시 넘어 보문사에 도착하니, 주차비(2000원)와 입장료(2000원)가 무료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 대부분은 입장료를 폐지했지만 비경이 좋은 곳임에도 보물이나 국보가 없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몇몇 사찰에선 여전히 입장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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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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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의 낙가산(洛迦山)에 터를 잡고 있는 보문사는 635년(선덕여왕 4년)에 회정(懷正)대사가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창건했다고 한다. 낙가산이란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머물렀다는 보타낙가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보문(普門)은 불교 용어로 ‘우주의 모든 사물은 일체의 법(法)을 포섭하고 있다’는 뜻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등사의 말사였다가 1994년 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보문사의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시대에 강화도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는 없고 인형을 닮은 돌덩이들을 건졌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로 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다시 돌덩이만 걸렸다. 그는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나타난 노승이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바다에서 어김없이 돌덩이를 건진 어부는 그걸 낙가산으로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돌이 무거워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이곳이 신령스러운 곳이구나,하고 생각한 어부는 굴 안에 단(壇)을 세우고 돌덩이를 두었다. 이후 어부는 큰 부자가 되었고 이곳은 보문사 석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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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석실 불당인 나한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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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내부. 23기의 돌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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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화 속 석굴은 현재 사찰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암벽 아래에 석실을 마련하고 23기의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여 일명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각 석불의 높이는 30㎝쯤 된다. 천진하고 익살스러운 얼굴로 만들어져 있어 친근감이 느껴진다. 나한상 재료가 된 돌은 인도에서 나는 석재로 알려졌다. 국내 유일한 천연 석실 불당이라고 한다. 석굴은 아치형 출입문 3곳으로 드나든다.

석실 앞에는 높이가 20m나 되고 가장 큰 둘레가 3.2m쯤 되는 향나무가 서 있다. 수령 700년이 넘었다는데 마치 용틀임하는 듯 기묘한 모습이다. 6·25전쟁을 거치며 고사(枯死)한 것처럼 보였는데 3년 뒤 감쪽같이 다시 살아났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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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불자들이 설법을 듣던 바위 바당에 조성된 500 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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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매표소(일주문)에서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용왕전이 자리잡고 있다. 황금잉어상과 두 마리의 용 조형이 서해를 바라보고 있다. 용왕전 옆에는 과거에 1000명이 동시에 앉아 설법을 들었다는 길이 40m, 폭 5m의 너른 바위 마당인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지난 2009년 천인대 위에 500개의 나한상과 와불전(臥佛殿)을 조성했다. 3층 관음보탑을 중심에 두고 마치 계단식 공연장에 관객들이 들어찬 모습이다. 각 나한상들을 들여다 보면 모습과 표정이 제각각이다.

길이 13.5m, 높이 2m 크기의 부처님 석상이 누워있는 와불전은 와불 뒤로 공간이 있어 주위를 돌면서 참배할 수 있다. 보문사의 본당은 중앙에 자리한 극락보전인데 이곳도 용상(龍象)이 내외부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약 1km, 10여분 정도 낙가산을 올라가면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마애관음보살상’이 나온다. 올라가는 길은 모두 418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어보다 지쳤다.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있어서 계단길 연등엔 소원문들이 가득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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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경내에서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는 눈썹바위까지 연결되는 계단길. 연등마다 소원문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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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 눈썹바위 아래에 조각한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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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9.2m. 눈썹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바위(눈썹바위)에 조각한 마애불은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가슴 언저리엔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스님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인 배선주가 함께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애불은 온 얼굴에 넉넉한 웃음을 간직하고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소원문에 적은 중생들의 갖은 소원을 잘 들어줄 것만 같다. 여기서 바라보는 보문사 앞바다의 풍광은 워낙 아름다워서 ‘강화 8경’ 가운데 낄 정도다.

서해 낙조 일번지 석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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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에서 내려다 본 서해. 강화도의 절경 ‘강화 8경’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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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명산(327m)과 상봉산(316m), 낙가산(267m)이 등산로로 이어져 산행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지난 2017년 강화도와 이어지는 길이 1.5km의 석모대교가 개통되며 접근성이 개선된 덕에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늘었다.

서해에 바싹 붙은 석모도의 보문사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은 유명하다. 다만 방문했던 날엔 찬란한 노을을 만나진 못했다. 계절에 따라 해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다른 일몰명소인 석모도 동쪽의 민머루해수욕장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삼산저수지 둑 위에 올라 다행히 낙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의 촬영지인 상하저수지도 지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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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삼산저수지에서 바라본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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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석모도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섬이었다. 조선 숙종 때 벌인 간척사업으로 북쪽의 송가도, 남쪽의 매음도와 연결됐고 일제강점기에 추가 간척으로 어유정도까지 이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됐다. 간척으로 얻은 섬 북부와 서부에는 커다란 염전이 있다.

‘석모도 바람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매음리 선착장에서 시작해 동쪽과 남쪽 해안을 따라 보문사까지 걷는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중 11번째가 석모도 코스다. 어류정항, 민머루해변, 어류정 낚시터, 보문사 입구까지 총연장 16km 구간으로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섬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일주도로 드라이브 코스도 인기다. 과거 석모도에는 말목장이 있었고 여기서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는 사자황(獅子黃)과 같은 누런말을 길러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유독 자주 등장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39년을 항전하면서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 조선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당초 강화도로 피난하려다 실패해서 청나라에 왕자가 인질로 잡혔다. 강화도는 살려두기는 위험하고 죽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있는 왕족들의 단골 유배지이기도 하다. 고려 희종, 조선 연산군·임해군·영창대군·광해군·철종 등이 여기에 유배됐다. 근대에 이르러선 미국과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았고(신미양요·병인양요)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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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선원사 절터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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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대몽항쟁 시절, 강화도에선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당시 수도를 강화로 옮긴 최우 정권은 강화도에 선원사(禪源寺)라는 절을 세우고 대장경 조판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몽고의 칩입으로 1012년 만들어진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됐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할 사회적 에너지를 한데 모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내용도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걸작이다.

선원사는 충렬왕 때 궁전으로 사용하였을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부두에서도 가까워서 목판을 운송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서 자란 산벚나무를 가져다가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건조한 뒤 작업에 썼다. 선원사는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뒤 쇠퇴하기 시작했다. 선원사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왕조 초기에 합천 해인사로 옮기고 나서는 더 빠르게 쇠락했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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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바라본 서해 낙조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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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유적도 강화의 볼거리다. 이곳 고인돌 유적은 고창군, 화순군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전국체전 성화가 출발하는 마니산과 단군왕검이 쌓았다는 참성단(조선시대 중수함)도 유명한 곳이다. 강화도는 6·25 전쟁 때 개성을 떠난 실향민들이 터를 잡아 살면서 개성 특유의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현장을 두루 간직한 강화도를 꼼꼼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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