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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김별아의 문화산책] ‘출산 전도사’의 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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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사랑조차 의심했던 나

아이 낳아 기르며 완전히 바뀌어

‘가정의 달’ 끝머리 소심한 고백

부디 당신도 이 행복 누리기를

내가 ‘사랑’을 믿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은 후부터였다. 효성스럽지 않았던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의심하며 불퉁댔다. 감정과 욕망이 빚어내는 순간의 신기루, 연인과의 사랑에 회의했다. 그런 시큰둥이가 일말의 의심과 회의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게 된 것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부터였다.

아이 볼래 밭맬래 물으면 호미 들고 나선다더니, 이것은 다른 차원의 중노동이었다. 온몸의 마디마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잠은 늘 부족했다. 사회 활동은 제한받고 기존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생존을 건 전투와도 같은 육아에서 전우애를 쌓지 못한 배우자와는 불화했다. 출산 전과 이후의 삶 사이에는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크레바스만큼 깊고 가파른 틈이 생긴 듯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삶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단 한순간도 자력으로 살아내지 못 하는 핏덩이를 살리기 위해 가진 에너지 전부를 짜내어야 했다.

나는 있는 힘껏 사랑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간난고초도 견딜 수 있을 듯했고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종족 보존의 본능일지 모른다. 자식을 분신(分身)으로 비유하는 바와 같이 자기애의 발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아이를 기르며 느낀 완전한 충만과 일체감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사랑’의 내용이 익히 알려진 내리사랑과 모성애 따위가 전부는 아니었다. 희생은 보상 없는 일방통행이다.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고 바치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의 퍼즐은 일방이 아니라 또 다른 기억의 조각을 더해야 완성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 과정에서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부모에 대한 아이의 압도적인 사랑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를 열렬히 사랑한다. 물론 그 또한 감정이나 생각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어린 생명들이 보호와 돌봄을 받기 위해 귀여운 신체적 특징으로 무장한다는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 이론과 같은 맥락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의심 없는 사랑은 치유다. 어떤 이는 예순이 다 되어서야 자기 삶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이 어릴 적의 미해결 욕구들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세계로 나아가는 데 물질적·정서적 결핍이 차꼬가 되어 발목을 잡은 게다. 어려서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허무와 타나토스의 충동을 강하게 느껴왔던 나는, 아이를 기르며 비로소 애정 결핍을 해소하고 삶이라는 지상 명령에 복종했다.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절대성을 믿게 되었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완벽하게 좋은 엄마는 될 수 없었고, 평범한 욕심으로 아이에게 실망하고 때로 사납게 으르렁대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행여 놓칠세라 내 손을 홈켜잡았던 고사리손의 사랑을 끝내 의심치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얼결에 ‘출산 전도사’로 불린 뒤로 내내 부끄러웠다. 건강과 여건이 허락지 않은 탓이지만 서넛도 아닌 달랑 하나를 낳아 기른 주제에 그런 이름은 가당찮았다. 백약이 무효인 저출생 시대에 불임과 멸절을 택한 젊은 세대에게 감히 전하여 인도할 진리 같은 것도 없다. 다만 ‘가족의 달’인 5월이 저무는 마당에, 내 삶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 것만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은 없었다고 조심히 고백하고 싶다. 아이는 내가 30년 동안 쓴 어떤 작품보다도 소중한 작품이며, 나는 그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새롭게 거듭났다. ‘출산 전도사’로 불린 김에 주제넘게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나는 애국이나 사회적 책무 같은 거창한 말을 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토록 누추하고 시시한 ‘행복’을 당신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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