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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연암 박지원 소설집』 박지원 “제 것 아닌 것 취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는 도적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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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조금만 먹고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 한낮이 되면 문득 벽에 기대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고 ‘용호교(낮잠)’를 취할 뿐이었다. 환갑을 넘긴 한 남성이 한양 근교에 위치한 절 봉원사에서 ‘도인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마 불교 수행법인 일종식과 장좌불와로 추정된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닌가. 허생 이야기를 비롯해 완흥군 부인, 변승업 이야기 등등.

“문채 있는 수많은 말을 쏟아놓는데, 몇 날 몇 밤을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거짓인 듯, 기이한 듯, 괴상하고 속이는 듯해 모두 족히 들을만하였다. 그때 그가 스스로 자기의 성명이 윤영이라고 했다.”(「허생후지 2」, 276쪽)

세계일보

그러니까 1756년 병자년 겨울, 스무 살 선비 박지원은 봉원사에 공부하러 갔다가 절에서 객으로 머물고 있던 윤영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허생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다시 18년의 시간이 흘러 1773년 계사년 봄, 박지원은 평안도 성천의 비류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다가 십이봉 아래 암자에서 노인을 재회했다. 이때 윤영의 나이가 80세를 넘었지만 걸음걸이는 나는 듯했다. 박지원은 이때 허생의 이야기 중 한두 가지 모순되는 점을 물었고, 노인은 곧 어제 일처럼 똑똑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해 줬다.

“자네가 전에 허생을 위하여 전을 쓴다고 했는데, 글이 응당 다 되지 않았는가.” 노인은 반가운 대답 끝에 되묻었다. 박지원은 아직 다 적지 못했다고 노인에게 사죄했다. 그런데 이때 박지원이 ‘윤 노인’이라고 불렀는데, 노인은 자신의 성은 윤이 아니라 신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이때서야 노인이 “이상한 취향의 선비”인 줄 알게 됐다고, 『열하일기』의 ‘주설루본’에 기록했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 진하사를 따라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처남 집을 오가면서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24년 만에 한문소설을 창작, 『열하일기』의 ‘옥갑야화’편에 수록했다. 바로 “연암의 소설 중 가장 구상과 착상이 뛰어난 득의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소설 「허생」이었다.

물론 연암은 기인 윤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24년 뒤에 창작한 것으로 자신이 지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소설의 개연성을 높이는 한편 당시 시류에 저촉되는 데 대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의도적인 서술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옥갑에 돌아와서 여러 비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는 밤새 이야기를 했다. 중국의 서울인 연경은 예전에는 풍속이 순후해 역관패들이 말하면 만 냥이라도 서로 빌려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이 우리에게 사기 치는 짓을 능사로 여긴다.”(243쪽)

소설은 연암 일행이 열하로 연행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옥갑에서 무관 비장들과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기록한 형식으로 풀어간다. 남다른 신의로 큰돈을 벌었던 역관 홍순언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이야기 끝에 화자인 ‘나’는 기인 윤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자, 이제 윤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놓아보리다. 허생은 묵적동에 살았다고 합니다. 남산 밑으로 곧장 쭉 내리받이로 가다 보면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곁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는군요. 허생의 집 싸리문은 은행나무를 향해 열려 있고, 몇 간 되지 않는 초가집은 그나마 비바람도 채 가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허생은 오직 책 읽기만 좋아할 뿐이어서 그 아내가 남의 삯바느질을 하여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였다지요.”(251쪽)

10년 계획으로 글공부를 하던 허생은 가난과 아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7년 만에 중단한 뒤 장안의 갑부 변씨를 찾아간다. 변씨에게서 1만 냥을 빌려서 안성에서 장사를 시작해 큰돈을 번 뒤 도둑들과 여성들을 이끌고 서남해의 외딴 섬으로 들어간다.

“추수를 하여 삼년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하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일본 나가사키)로 팔러 가져갔지요. 장기도는 일본에 딸린 주로 가구 수가 삼십일만 호나 되지요. 마치 장기도에는 큰 기근이 들어 그들에게 곡식을 베풀어 구제하고는 은 백만 냥을 벌었답니다. 그제야 허생은 한숨을 쉬며 말했지요. ‘이제야 나의 작은 시험을 마쳤구나.’”(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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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돈을 바다에 버리고 글을 아는 사람들을 이끌고 홀연히 뭍으로 나온 뒤 변씨에게 10만냥을 갚고 친구가 된다. 하루는 변씨의 소개로 어영대장 이완이 찾아오자 북벌의 묘책으로 세 가지 지혜를 냈지만, 이완이 모두 어렵다고 하자 이완을 쫓아낸 뒤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 양반들을 질타한 그의 목소리만 남기고.

“소위 사대부라는 것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하는 놈들이야!⋯ 아, 번어기는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자신의 머리를 아까워하지 않았고, 무령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오랑캐 복장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대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한 줌밖에 안되는 상투를 아껴! 지금 장차 말달리기, 검 찌르기, 창 찌르기, 활쏘기, 돌 던지기를 해야 되는데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도 않고서 제 딴에 이것을 예법이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세 가지 계책을 말해주었는데 너는 한 가지도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믿음직스러운 신하를 자처해! 믿음직한 신하가 정녕 이따위란 말이냐? 이런 놈은 목을 베어야 해!”

「허생」을 비롯해 박지원의 한문소설들은 교과서 수록은 물론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2006년 박지원의 모든 한문소설을 모아 『연암 박지원 소설집』을 번역 출간했던 인하대 초빙교수이자 고전독작가 간호윤이 20년 만에 3차 전면 개정판 『조선의 양심, 연암 박지원 소설집』(소명출판)을 최근 펴냈다. 박지원의 소설은 그 동안 주로 아동이나 청소년용으로 발간돼 왔고, 성인을 겨냥한 작품의 경우 대체로 낱권 또는 몇 개의 작품만 묶여 출간돼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간 교수는 “기존 개정판의 해석이나 문맥, 기타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소설집에는 연암이 18세 무렵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광문자전」을 비롯해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 「호질」, 「허생」, 「열녀함양박씨전 병서」까지 모두 10편이 수록돼 있고, 소실돼 구체적인 문장을 알 수 없는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의 경우 해설을 담았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이 소설로 형상화한 조선 사회와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박지원은 계급의 사슬 속에 갇힌 시대에 왜 소설을 써야 했을까. 소설집 작품을 통해서 박지원과 조선 사람들을 만난다.

연암이 18세 때 창작, ‘연암소설의 숫눈길을 열어젖힌 소설’로 평가되는 「광문자전」은 광문이라는 거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연암이 병으로 고생할 때 적적함과 병으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 겸인이나 문객, 하인들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광문에 대한 일화를 전해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문이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의 시장통에서 밥을 빌어먹었는데, 여러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패두로 추대하고서는 그들의 움막을 지키게 했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진눈깨비가 내렸다.”(123쪽)

수표교 다리 밑의 거지 우두머리 광문은 한 아이가 죽으면서 살해범으로 내몰리고 마을로 쫓겨 갔다가 도둑으로 몰린다. 집주인의 선처로 풀려난 광문은 죽은 아이의 시체를 장사지내주고 이를 지켜본 집주인의 추천으로 약방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약방에서 돈이 사라지면서 광문은 다시 도둑으로 의심받지만, 약방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져간 것이 드러나면서 모두의 칭송을 받는다. 심지어 장안에서 이름난 기생 운심조차 사대부의 요청에는 반응하지 않다가 광문이 들어서자 혼연히 일어나 춤을 추는데.

“광문은 더 앞으로 썩 나가 앉아 무릎을 치며 콧노래로 높고 낮은 장단을 맞추니,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광문을 위해서 칼춤을 추었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다시금 벗을 사귀고 흩어져갔다.”(128쪽)

중국 점포에 기록된 기문을 가필한 것으로 알려진 「호질」은 연암이 1780년 북경 사절단에 동행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열하일기』의 ‘관내정사’편에 수록한 우언 소설이다. 연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원숙하고 필력이 집결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느 날 대호(大虎)가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불결하게 느껴진다며 청렴한 선비 고기를 먹기로 한다. 이때 북곽 선생이라는 선비는 동리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한다. 선비는 동리자의 아들들에 쫓겨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분뇨구덩이에 빠진다. 구덩이에서 겨우 기어나오자 대호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양반들의 무능과 위선, 아첨을 비판한다.

“가까이 오지 마라! 저번에 들으니 ‘선비 유’란 ‘아첨할 유’라 하더니 정말이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나쁜 이름은 모조리 모아서 망령되이 내게 덧씌우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믿겠느냐. 무릇 천하의 이치는 하나뿐이다. 범이 참으로 악하다면 인간의 성품 또한 악한 것이고, 인간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 또한 착할 것이다.”(218쪽)

선비는 목숨을 살려달라고 모리를 조아리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범은 보이지 않고 농부가 그의 행동을 묻는다. 선비는 농부에게 자신의 행동이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는 것이라고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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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설 「열녀함양박씨전 병서」는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1793년 쓴 것으로, 과부의 성욕과 열녀제도의 모순을 다룬다. 안의현감 시절 통인 박상효의 조카딸이 함양으로 시집갔다가 요절한 남편을 따라 순절한 사건이 발생했다. 연암은 이에 「열녀함양박씨전 병서」를 써서 그녀의 순절을 예찬했다. 하지만 소설을 조금 더 들어가면 ‘생기 없는 삶’이나 자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선 과부제도 모순과 열녀문의 허실을 폭로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대저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로 인하여 작용하는 것이며, 그리움은 고독에서 생기고, 슬픔이란 것은 그리운 생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과부란 고독한 신세에 처하여 슬픔이 지극한 사람이란다. 때로 혈기가 왕성해지면 과부라 해서 어찌 정욕이 없겠느냐? 가물가물한 등잔불만이 제 그림자를 위로하는 고독한 밤이면 새벽도 더디 오더구나. 처마 끝에 빗방울이 똑똑 떨어질 대, 창가에 비치는 달이 흰빛을 흘리는 밤, 나뭇잎 하나가 뜰에 흩날리고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서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코를 드르렁 골고, 돌아가신 네 아버님이 그리워 잠 못 드는 그런 깊은 밤에 내가 누구에게 이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하겠느냐?”(293쪽)

박지원의 소설집을 번역 출간한 간 교수는 “12편의 작품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양반들에게서 부조리를 찾고 백성들의 절박한 삶을 바라보고 올바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면적 통일성을 지닌다”며 “정론을 강조한 데 따른 문학적 심미성의 부족을 역설과 풍자, 기지 따위의 문체적 수사를 통해 상쇄하고 독자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간다”고 설명했다.

열여덟 살 젊은 선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처음 젊은이를 동정적으로 대해주던 이들조차 나중에는 미친 것 아니냐며 꺼리거나 수근덕거렸다. 2년 전 처사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뒤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에게서 『맹자』와 『사기』를 비롯해 학문과 시, 글을 배우던 그였다. 특히 처남인 이재성과는 죽이 잘 맞았고.

1754년, 한양의 젊은 선비 박지원은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울증을 고쳐보려 했다. 밤이면 오래된 하인들을 불러 저자거리에 돌아다니는 기이한 일을 묻곤 했다. 이때 거지 광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다. 맞아, 옛 사람의 편침, 온피 같은 것을 자주 흉내내던 어린 시절 광문을 본 적이 있었지. 그래, 아주 추하게 생겼지.

막 문장 짓기에 힘쓰고 있던 그는 거지 광문을 위한 전을 쓰기 시작했다.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서 몰인정한 조선 사회와 위선을 풍자한 첫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그는 어른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줬고,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창작의 의미와 기쁨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문장가 박지원의 원점이었다.

“나는 열여덟 살 때에 심한 병을 앓아 밤이면 늘 우리 집의 오래된 하인들을 불러 거리에 돌아다니는 기이한 일을 묻곤 하였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광문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어린 시절 광문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는 아주 추하게 생겼다. 내가 막 문장 짓기에 힘쓰던 때, 광문을 위한 전을 지어서는 여러 어른께 보여드려 하루아침에 고문사로 칭찬을 받았다.”(「서광문전후」, 130쪽)

조선 영조 시대인 1737년 한양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아버지 박사유와 이창원의 딸 함평 이씨 어머니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박지원은 열여덟 살 때 첫 단편 「광문자전」을 쓰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문소설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웅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호질」, 「허생」, 「열녀함양박씨전 병서」 등을 창작했다. 탁월한 기행서 『열하일기』도 저술했다.

박지원은 집안 어른들의 기대에 과거에 응시해 1차에서는 장원을 했지만 2차에선 일부러 백지를 제출한 뒤 과거를 피하고 대신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했다. 박제가를 비롯한 실학파 선비들과 관계를 맺었고, 홍대용으로부터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 신학문을 배웠다. 정조 즉위 직후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 연암계곡에 은거하기도 했다. 연암이란 호는 골짜기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1780년, 팔촌형 진하사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들어갔다가 건륭제가 열하의 여름 별궁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어서 열하까지 들어갔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 사상을 담은 대표작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거듭된 권고에 따라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해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805년 작고했다.

조선 양반들의 타락과 위선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 인간상을 제시한 연암, 파격적인 주제와 기발한 문체로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 주역이었던 박지원. 조선 최고 문장가의 소설과 문장은 200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아니, 조선 양반을 향한 범의 질타는 이제 돈에 포위된 현대인들에 향한 포효로 돌변해 몰려오고 있었으니.

“대체 제 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한다. 네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쏘다니며, 황황히 팔을 걷어붙이며 눈깔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 심지어 돈을 ‘형’이라 부르지 않나, ‘장수가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지 않나. 이러고도 다시 인륜의 떳떳하고 변하지 않는 도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호질」, 22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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