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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상직 변호사의 창의와 혁신] 〈22〉노년의 삶을 위한 창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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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문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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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하숙집 형을 따라 영화 '변강쇠전'을 보러갔다. 어둑한 극장 복도 끝에서 곧장 걸어오는 젊은이가 있다. 부딪치기 직전 피했지만 그도 내가 피한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도 나처럼 짜증난 얼굴로 노려봤다. 주먹이라도 날릴까 두려웠다. 누구였을까. 커다란 거울 속의 나였다. 그 뒤로 나 자신을 그토록 진지하게 맞닥뜨린 기억이 없다.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그랬듯 때론 용감했고 때론 비겁했다. 젊을 땐 공동체를 돌리는 쳇바퀴에 들어가려 애썼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나 없으면 쳇바퀴가 멈출까 걱정했고 나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에 실망했다. 그땐 성공과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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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작가 이소연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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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보자. 아이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같이 어부 일을 할 아이가 생겨 기뻤다.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 '요하네스'라고 불렀다. 소설은 곧장 노인이 된 그의 마지막으로 넘어간다. 잠에서 깼는데 아픈 곳이 없고 몸이 가뿐하다. 친구를 만나 뱃일을 나가지만 미끼가 물에 잠기지 않는다. 그물에 걸린 꽃게를 팔려하지만 오랜 단골은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길에서 만난 사랑하는 딸은 그를 모른 척 지나쳐 그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는 아쉬워하며 친구를 따라 먼 길을 떠난다. 그렇다. 그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죽었다. 소설은 출생과 죽음의 순간만을 담담하게 그릴 뿐 그 사이 삶의 묘사를 생략했다. 속세의 성공담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삶의 평범함이다. 아름답다. 아침처럼 왔다가 저녁처럼 가는 것이 인생이다.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고령화를 형벌처럼 선고받은 시대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은퇴가 두렵다. 부모는 늙고 자녀는 어리다. 선진국 문턱에서 경제침체를 맞으니 MZ 등 세대갈등도 깊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온갖 혜택을 누리고도 일자리를 넘겨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선 경제력은 물론이고 관계가 중요하다. 가족과 직장, 친구가 그것이다. 가족을 위한다며 직장, 친구를 더 챙겼다. 더 중요한 것은 뭘까. 나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가. 소홀하지 않았던가. 화장실 거울로만 맞닥뜨리던 나 자신과 얘기해 본 적 있는가. 노년의 건강하고 자존감 높은 삶을 위해선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노년의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친구 등 관계의 부족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어색함이다. 허름한 노포에서 혼자 막걸리 한잔 기울이지 못한다. 가족의 생계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네트워킹'이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며 나 자신에 소홀했다. 오히려 모질게 채찍질하지 않았던가. 바쁘지 않을 때도 나 자신과 마주하기 두려워 엉뚱한 소일거리를 찾았다. 뒤늦게 나 자신을 마주하려니 어색하다. 물론 경제력 등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늦출 순 없다. 당당하게 나 자신과 눈을 마주하자. 안치환의 노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처럼 인생을 탓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나에게 따뜻한 술잔,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자.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삶을 그리자. 세상에서 받은 혜택에 가치를 더해 아낌없이 다음 세대에 돌려주자.

신문 부고를 보면 대부분 이 병 때문에 죽는다. 세월에 묻어온 마음의 병 노환(또는 숙환)이다. 병마가 덮치기 전에 용기를 내자.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기억하는가. 노인 산티아고는 홀로 바다에 나가 사투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상어의 습격으로 머리와 뼈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항구에 도착한다. 그가 한 일은 뭘까. 청새치를 잡고 상어와 싸운 것이 아니다. 자신과의 지독한 싸움이고 대화며 화해다.

쳇바퀴에 갇혀도 주 52시간 근무에 그친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글귀처럼 고립을 피해 군중 속에 시들지 말자. 자신과의 대화에서 나온 건강한 자존감은 노년을 위한 창의의 시작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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