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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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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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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 그대 뒤에 있었다

그대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
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대의 한쪽 무릎이 주저앉을 때
노을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라
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

그 별이 더 많은 별을 불러올 것이다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

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
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

-시, ‘노을’,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며칠째 땡볕이 이어진다. 하지가 열흘 남았는데 7월인가 싶게 뜨겁다. 상춧잎도 헐떡거리고 여린 고춧잎도 기진맥진해 보인다. 붉은 꽃 수없이 피워내던 양귀비도 시들해지고 감자잎이 눕고 마늘대도 노리끼리해졌다. 하지 무렵 땅과 이별해야 할 감자와 마늘 너머 옥수수밭만 청청하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날마다 다르게 커간다.

귀촌해 사는 동안 땅이 공짜로 생기곤 한다.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뜬금없이. 그렇다고 내가 땅임자가 되지는 않지만, 최소 1년간은 그 땅을 감당해야 한다. “안간힘을 쓰”고 “기진맥진해 있”다, “한쪽 무릎이 주저앉”고 다른 쪽 무릎이 꿇리고, 누군가 밭고랑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간 소중한 땅이니까. 빌려서 쓰는 땅, 도지(賭地)는 누군가 아프거나 힘들어서 농사를 포기할 사연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농사를 지어 온 어른들은 아프다가 점점 더 앓다가 결국에는 농사를 포기하게 된다. 땅을 사두고 씨나 모종만 심어두고 며칠 걸러 와보는 도시인들도 한두 해 해보다 왕성한 풀 때문에 포기를 한다. 포기할 이유는 흙 속에 씨로 숨어 있다가 어느 날 솟구친 풀처럼 무궁무진하다. 저 넓은 땅에 무엇을 심으랴, 올봄에 갑자기 생긴 600여평 밭을 두고 시름이 깊었다.

첫째, 나도 젊은이가 아니니 주제 파악 먼저 하자. 둘째, 풀을 이기지 못한다면 적어도 공존 공생할 수 있는 작물을 심자. 셋째, 나눠서 하자. 하루에 한 이랑씩 멀칭하고 일주일 간격을 두고 옥수수알을 심자. 넷째, 천하태평으로, 그러나 꾸준히 돌보자. 다섯째, 순차적으로 자라게 하고 나날이 수확을 하자. 나는 거저 생긴 이 밭을 ‘초등학교’라고 부르고 도지농사에 돌입을 했다. 삶은 나날이 살리는 일 아닌가 생각하며. 농부나 부모나 선생이나 서로를 살리는 이 아닌가 질문하며. ‘살림’이 곧 나와 주변을 살리는 거룩한 일 아닌가 새삼 절감하며. 서로를 살리는 나라를 만들지 못해 애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어두운 시대를 애도하며. “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음 추스르며.

노리끼리하던 흙학교가 거창한 사유와 사소한 땀방울로 버무려져 푸른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이랑마다 키 높이가 제각각이다. 6학년 옆에 5학년이 자라고, 5학년 옆에 4학년이 올라가고, 마지막에 이웃과 함께 심은 1, 2, 3학년 옥수수들도 내 허리께를 넘어선다. 한 이랑에 200, 1000여그루 남짓 쑥쑥 자라나는 초등학교 옆은 그냥 풀밭. 멀칭 안 한 풀밭은 산소를 내뿜는 초등학교 운동장이라 하자. 일정한 간격으로 낫질해서 6월 말 들깨 심을 자리에 덮어주면 자연멀칭 아닌가.

낫질하다 땀방울 훔치며 고개를 드니, 노을이 내 뒤에 있었구나. “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며 “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다. 불그레하니 술 한잔 들이켠 낯빛이다. 하긴, 종일 팽팽 도느라 해도 힘들겠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는 이여,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 나보다 수고롭고 나보다 짙은 어둠 속을 통과하는 이여, “포기하지 마라”. “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

경향신문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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