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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이기적 이데올로기는 사라지고 공감의 본성은 남는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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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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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l 김영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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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고통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맹자의 ‘불인인지심’을 서양의 진화학자들이 알지 않았을까 싶어 이런저런 책을 뒤적여 보았다. 이제는 상식이 된 진화론에 입각하면, 어떤 생명집단에 공감하는 유전자를 지닌 생명체와 이 유전자가 없는 생명체가 있었다면, 장기적인 측면에서 공감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현대사회가 경쟁이나 이기성을 강조하더라도 자연의 역사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을 터다. 그러다 얼마 전 타계한 프란스 드 발이 ‘공감의 시대’에서 맹자의 그 유명한 글을 인용한 사실을 찾았다.



제 선왕이 흔종의 예를 치르기 위해 끌려가던 소가 자기 죽음을 알고 구슬피 우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아파 양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다.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은이는 맹자가 “누구든지 다른 이의 괴로움을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는 유명한 말을 하며 공감을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았다”고 밝혔다. 지은이는 맹자가 말한 대로 공감이 본성이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방대한 사례를 들었다.



붉은털원숭이를 대상으로 먹이가 나오는 줄을 당기면 동료에게 충격이 가해지는 실험을 했는데, 동료의 고통을 보고서는 줄 당기길 거부했다. 심지어 12일 동안 반응을 멈춘 원숭이도 있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굶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거울 뉴런 이야기도 나온다. 이 뇌세포는 원숭이가 직접 물건을 만질 때만 활성화하는 게 아니라 다른 원숭이가 만지는 걸 볼 때도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실험자가 땅콩을 집어 들었더니 역시 같은 세포가 반응하였다. 나와 타자의 경계를 지우고 공감하는 능력이 본능임을 보여준다.



일찌감치 테오도어 립스는 공감이 우리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본능이라 했는데, 현재는 인간종보다 더 이전에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단다. 이 공감능력은 아마도 부모의 자식 돌보기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포유류가 진화해온 2억년 동안 자손에게 민감한 암컷이 냉담하고 무관심한 암컷보다 더 많이 번식했을 터다. 새끼의 추위, 배고픔, 위험에 반응하지 못한 암컷은 유전자를 퍼트리지 못했다. 암컷의 민감도가 상당히 중요한 선택압이었다는 말이다.



공감의 자동성을 둘러싼 논쟁도 흥미로웠다. “공감은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으로 자동성은 “그 속도와 잠재의식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공감의 기초적인 전제조건은 일치화이다. 그런데 타자와 일치화하는 데 문화적 배경, 민족, 나이, 성별, 직업 등이 비슷하면 쉽고, 배우자, 자식, 친구라면 더욱 쉽지만, 다른 집단에 속한 경우에는 쉽지 않았다.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도 맹자인데, 이른바 차등애라 하여, 우리의 공감과 사랑의 농도가 동심원적 확산을 한다고 보았다. 맹자는 구체적으로 친족간의 사랑(친친)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민)보다 짙고, 인민은 동식물을 아끼는 것(애물)보다 짙다 말했다.



강한 인상을 남긴 구절이 있다. “이데올로기는 지나가지만, 인간의 본성은 존속한다.” 그동안 경쟁적, 폭력적, 이기적 존재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였다. 인간의 본성에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적에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 있을 테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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