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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우리나라 최고병원이 이래도 되나요"… 환자들 텅빈 대기실서 분통 [의사 집단 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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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무기한휴진 첫날

소속병원 4곳 교수 55% 동참

외래환자 평소보다 50% 줄어

분당 뇌신경센터 80%가 참여

尹 “비상대책에 만전을” 당부

정부, 공정거래위에 의협 신고

“환자 불안, 정부 압박 도구로 사용”

환자·의료단체 “당장 철회” 촉구

18일 의협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

정부 “진료 거부 불법… 엄정 대응”

서울대병원 무기한 휴진 번복에

전공의 “교수들에 기대한게 잘못”

“우리나라 최고 병원에서 환자 생각을 이 정도로 안 해도 되나요.”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무기한 집단휴진을 시작한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김성희(53)씨는 80세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직장암에 걸린 아버지의 외래 진료를 위해 경북 포항에서 오전 5시 기차를 타고 머나먼 ‘상경 길’에 나섰다. 오전 3시에 일어나 고된 일정을 소화한 김씨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면서도 “아직 외래가 밀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세계일보

막막한 환자들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전공의 사태 해결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휴진을 시작한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한 환자가 휠체어를 탄 채 지나가고 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이번주 수술실 가동률은 전공의 집단이탈 이전 대비 33.5%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최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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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타는 환자들과 달리 병원 곳곳에선 집단휴진의 여파가 보였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전공의 사태 해결을 요구하며 이날 무기한 휴진을 시작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비상대책위원회는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등 소속 병원 4곳에서 환자 진료를 하는 전체 교수 967명 중 529명(54.7%)이 휴진에 동참한다고 밝혔다.

서울대병원 외래 진료 첫 방문 환자들을 위한 접수창구 대기석 곳곳은 텅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창구 안내 봉사자는 “환자 수가 평소보다 50%는 줄었다”며 “집단휴진 영향인 것 같다”고 했다. 한 청소노동자도 “여기서 일한 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평일에 이렇게 사람 없는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재활의학과·정형외과 등에서 진료를 보는 교수는 한두 명뿐이었다.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는 이날 오전과 오후를 통틀어 환자를 받은 교수가 7명에 그쳤다. 뇌신경센터 소속 신경·신경외과 교수만 총 31명이니, 교수 80%가량이 진료에서 손을 놓은 셈이다. 평소라면 북적였을 진료실도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오후 1시 기준 센터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는 20명이었는데, 할당되는 환자 수가 늘면서 교수 한 명에게 환자 7명이 대기했다.

산부인과는 눈에 띄게 환자 수가 줄었다. 진료실 앞에 대기하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날 유방암 치료 후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는 한 환자는 “평소엔 지연 대기 문자를 받는 게 일상적이었는데, 의자가 전부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색하다”고 했다.

세계일보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전공의 사태 해결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휴진에 들어간 17일 서울대학교병원이 한산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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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불안감을 호소했다. 진료가 언제 취소될지 몰라 애를 태웠다. 서울대병원 수술 대기실에서 만난 김모씨는 “난소암이 재발한 동생의 수술이 방금 끝났다”며 “당장 수술이 잘 끝났다는 안도감보단 앞으로의 항암 치료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김씨는 “집단휴진 영향으로 혹여 치료가 미뤄질까 걱정된다”며 “암 환자에게 불안과 스트레스가 제일 안 좋다는데, 일부러 동생 앞에선 뉴스도 잘 안 튼다”고 했다.

불면증 치료를 위해 분당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를 찾은 박모(60)씨는 “한눈에 봐도 환자가 줄었더라”며 “의사 선생님들이 지금 급한 환자는 받고 계실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휴진이) 길어지고, 정말 아파도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땐 모두의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이 다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상황이 빨리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병원 밖 환자들도 휴진에 나선 서울의대 교수들을 향해 “환자의 불안과 피해를 정부를 압박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고 비난하고, 대한의사협회(의협)와 서울의대·서울대병원 비대위의 휴진 방침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환단연)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서울의대 비대위가 목적 달성을 위해 무기한 전체 휴진이라는 선택을 꼭 했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정부를 압박하는 도구가 환자의 불안과 피해라면 그 어떤 이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공의 9000여명이 4개월 이상 의료현장을 이탈한 상황에서 의대 교수마저 무기한 전체 휴진에 돌입하면 의료공백으로 인한 환자 불안과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며 환자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단연은 “환자는 의대정원 숫자,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추진과 관련해 아무 잘못이 없고, 휴진을 무기로 삼는 의사들을 도와줄 수도, 함께할 수도 없다”면서 “의협과 서울의대 비대위의 집단휴진 및 무기한 전체 휴진 강행 방침을 규탄하고 당장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일보

서울의대 교수들의 집단 휴진 첫날인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치유글판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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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서울대병원의 무기한 휴진이 이날 시작된 가운데 대한의사협회(의협)는 18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열고, 전국 3만6000여 개원의 등을 포함한 집단휴진에 나선다.

정부는 의료계 집단휴진에 강경 대응할 방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와 주례회동에서 “의료계 불법 진료 거부에 대한 비상 대책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대통령실이 전했다. 이날 시작된 서울대 의대 교수들의 집단휴진과 18일 의협의 집단휴진을 ‘불법 진료 거부’로 간주한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의협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사업자단체가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거나, 각 사업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 사업자단체인 의협이 개별 사업자인 개원의를 담합에 동원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당 법률을 위반하면 사업자단체는 10억원 이내 과징금을 물게 되고, 단체장 등 개인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신고 내용 및 집단휴진 진행상황 등을 면밀하고 신속하게 분석해 적극 대응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불법을 인정하면 검찰에 고발 조치되고 수사가 본격화한다.

세계일보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융합관에서 휴진 집회를 열고 의료정책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아래사진은 한국노총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 조합원들이 같은 날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사 집단 휴진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최상수 기자·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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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보건당국의 고발이 있으면 즉시 수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은 이날 “보건당국이 현장실사할 때 요청이 오면 협조해 도와주는 역할을 하겠다”며 “복지부가 관련 법률에 따라 고발하면 경찰이 수사를 맡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청장은 18일 총궐기대회에 대해선 “신고 집회에 대해선 얼마든지 보장하겠지만 신고 범위를 일탈하거나 다른 불법행위가 있을 때는 법에 따라 엄중하게 조치할 것”이라며 “의협이라고 해서 과하게도, 덜하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에서 수사 중인 ‘의협 전현직 임원 고발 사건’과 관련해선 “대체로 확인할 건 확인했다”며 “임현택 의협 회장을 얼마 전 소환했는데 1시간도 안 돼서 조사를 거부하고 귀가했다. 조만간 추가 소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편,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은 이날 환자 진료 대신 집회와 심포지엄을 열고 정부를 향해 △전공의 행정처분 완전취소 △현장 의견 반영 가능한 상설 의·정 협의체 △2025년도 의대 정원 재조정을 요구했다.

세계일보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전공의 사태 해결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휴진에 들어간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한산한 진료실에서 이용객이 대기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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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서울대병원 비대위가 휴진을 ‘무기한’이 아닌 ‘22일까지’ 진행할 것이라고 알려지면서 전공의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강희경 비대위원장이 집회 직후 “더는 무기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번주만 휴진하고 다음주부터는 현재 휴진 계획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인데, 비대위는 이후 “일주일만 휴진하겠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입장을 바꿨다. 비대위는 “진료 일정은 일주일 단위로 변경되고 있다”며 “향후 참여율과 진료 예약 변경 내용에 대해서는 진행되는 대로 공지하겠다”고 밝혔다.

전공의들은 서울의대 교수들이 휴진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한 전공의는 의사 커뮤니티에 “휴진한다면서 서울대병원에 온 환자들 진료를 다 봐주고 있다”며 “처음부터 (휴진한다는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 교수들에게 기대를 한 게 잘못”이라고 비꼬았다.

방재승 서울의대 비대위 투쟁위원장이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전공의와 의대생이 복귀하지 않으면 교수들은 휴진을 철회하고 환자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발언에 대해 한 의대생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원래 씹수(욕설+교수)들이 하던 대로 한 것”이라며 “교수들이 우리를 구제해줄 수는 없다. 원래대로 전공의와 의대생 등 젊은 의사들끼리 똘똘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예림·윤솔·이정우·조희연·백준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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