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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차가운 평화 시대, 저마다 사랑을 탐닉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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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l 문학동네 l 3만원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29년 자신의 결혼 소식에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 애인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이 쓴 희곡 ‘해피 엔드’를 연극 무대에 올리며 또다른 애인 카롤라 네어에게 주연을, 아내 헬레네 바이겔에게 조연을 맡겼다. 남자 주연은 전 부인 마리안네 초프의 새 남편이자 자기 딸 한네의 계부였다. ‘질투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때 비극적이었던 이런 성향을 오늘날까지 지니고 있는 건 속물들뿐입니다.”



1차대전 직전 유럽의 문화사·정신사를 독특한 필치로 담아낸 ‘1913년 세기의 여름’으로 주목받은 독일 작가 플로리안 일리스는 ‘증오의 시대, 광고의 사랑’에서 2차대전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 다채로운 인물들이 벌였던 사랑 행각들을 총망라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성사되지 못한 만남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토마스 만과 그의 자녀 클라우스·에리카 만,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 파블로 피카소, 마를레네 디트리히, 한나 아렌트 등 수많은 명사들의 사랑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한다. 불륜과 배신, 이성애·동성애·양성애 등으로 얽히고설킨, 광기 어린 ‘즉물적 로맨스’의 모습들은 오늘날 ‘막장’ 드라마를 가볍게 넘어선다.



지은이는 이 시기 “믿을 수 없게도 냉정함을 숭배하는 문화”에 주목한다. 낭만주의가 스러지고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뒤인 “1929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과거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토록 정신없이 현재에 몰두하고 있다.” 독일 작가 쿠르트 투홀스키의 연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언론인 리자 마티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모두 차가운 평화 시대의 아주 평범한 자식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매정하리만치 냉정했다. 우리는 대부분 곧 다시 잘못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이 대두한 1933년은 책의 유일한 변곡점인데, 지은이는 사랑을 탐닉하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덮쳐오는 거대한 증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담담하지만 실감나게 그려낸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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