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MP "핵실험 잔해 뒤지다 방사선 피폭…지식인 몰려 홍위병에 가족 고초"
등자셴 추모 발길 |
SCMP는 덩자셴이 1960∼1970년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까지 중국의 '양탄일성'(兩彈一星) 독자개발의 주역이지만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삶을 산 그는 불행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1924년 6월 25일 중국 안후이성 지식인 집안에서 출생해 '국가에 도움이 돼라'는 가훈을 바탕으로 자란 그는 중국 내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미국 퍼듀대로 유학했으며, 2년 만인 1950년 박사 학위를 따낸 뒤 곧바로 짐을 싸 조국으로 돌아왔다.
국공내전 끝에 1949년 공산당 승리로 마오쩌둥 주도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그다음 해 귀국한 그는 곧바로 중국 핵무기 프로그램(프로젝트596) 담당자로 선발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이때는 강대국을 열망했던 마오쩌둥이 당시 우방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기술 전수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독자개발에 나선 시기였다.
덩자셴은 1958년부터 프로젝트 596팀을 이끌고 소련·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들과는 다른 기술적 경로를 거쳐 내폭 폭탄을 설계했고 1964년 중국 신장지역 놉누르 사막에서 첫 원폭 실험을 성공시킨 데 이어 1967년 수소폭탄 첫 단계인 열핵 장치 테스트에 성공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중국 원폭 실험 성공과 환호 |
중국의 '양탄' 성공에 덩자셴 공은 지대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년) 광풍으로 미국 유학파 출신 덩자셴을 포함해 온 가족이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받는 고초를 당했다. 그의 여동생이 홍위병들 공격으로 쇠약해져 숨졌고 아내는 직장에서 폭행당했으며 딸은 시골로 내쫓겼다고 SCMP는 전했다.
덩자셴의 아내 시루시는 "당시 온 가족에 대한 타격이 작지 않았지만, 남편은 좌절하지 않았고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남편은 자신의 업무 계획을 이행하려고 노력했고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SCMP는 이후 덩자셴이 1979년 한 실험에서 실패한 후 폭탄 잔해에서 실패 원인을 규명할 부품을 찾겠다고 나섰다가 심한 방사능에 노출됐으며, 이 과정에서 암이 발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짚었다.
이 신문은 덩자셴은 1986년 자신이 사망하기 한 달 전에야 실험 중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암 발병을 확인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름이 공개됐을 정도로 생전엔 그의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중국 내에서 덩자셴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덩자셴과 미국 퍼듀대에서 함께 공부한 뒤 미국에 남아 연구를 계속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뒤 2017년 중국에 영구 귀국한 양전닝은 "덩자셴과 오펜하이머는 상반된 성격"이라며 "자신의 우월함을 보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오펜하이머와는 달리 덩자셴은 항상 겸손하고 절대 과시하지 않으려 했다"고 회고했다.
생전의 덩자셴 |
kji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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