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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폐기 법안을 새걸로” “청문회 자료 좀” 국회 갑질에 갇힌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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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 자료 준비 불려다녀 “한달째 의미있는 업무 못했다”

조선일보

지난해 10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정감사 피감기관 직원들이 자료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한 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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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국회 소통관 3층 스마트 워크센터. 50명 정도 일할 수 있는 사무실에서 10여 명이 분주히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국회에 출장 나온 정부 공무원을 위해 만든 사무 공간이다. 서류 작업을 하던 중앙 부처 공무원 한 명이 바로 옆 국회 의원회관으로 향했다. 2주째 세종시 집에 못 갔다는 그는 “여당 초선 의원이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을 재발의하려는데 새로운 법안처럼 손봐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가보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까지 국민의힘이 자체 가동하는 특별위원회에 제출할 자료를 손보던 참이었다. 옆 테이블의 다른 부처 공무원들은 야당이 단독 소집한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에 불출석하면 어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보고서를 만들고 있었다.

여야는 국회 원(院) 구성을 둘러싸고 최근 한 달 가까이 대치했다.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여야 양쪽에 불려 다니며 뒤치다꺼리하느라 ‘탈진’ 상태라고 한다. 여야가 지난 24일 원 구성에 합의했지만 민주당 등 야당이 단독 소집한 입법 청문회와, 이에 맞서 국민의힘이 자체 가동하는 16개 특별위원회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국회에 나온 수십 명의 중앙 부처 핵심 공무원들이 자료 작성과 회의장 출석에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회의에는 장·차관은 물론 행정 실무 주력인 중앙 부처 과장급들이 동원된다. 한 과장급 공무원은 “세종시 사무실을 비워 놓고 국회에서 여야 모두에 시달리다 보니 지난 한 달간 의미 있는 행정 업무를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한 고위 공무원은 “거대 야당은 의석수를 앞세워 정부 공무원들을 몰아붙이고, 여당은 이를 방어해주지도 못하면서 ‘일하는 여당’을 보여주려는지 공무원들의 등골을 휘게 하는 형국”이라며 “더 큰 문제는 국회 대응에 너무 많은 행정력이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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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야당이 독주하는 22대 국회 한 달을 보낸 공무원들은 여야 모두에 대해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민주당 등 야당은 지난 12∼13일 단독 소집한 법사위·과방위·행안위 등의 업무 보고에 장관들이 불참하자 장관과 산하 기관장 출석 요구 안건을 줄줄이 의결했다. 민주당 상임위원장들이 불출석하면 관련 법에 따라 고발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지난주부터는 장관들도 상임위 입법청문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야당 의원들의 공격을 막아주지도 않으면서 자체 특위에 공무원들을 불러내 업무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불만이 공무원들 사이에서 나온다.

한 공무원은 “수퍼 갑 거대 야당의 출현을 요즘 매일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한 공무원은 상임위 입법 청문회 대응 자료를 만들어도 실제 회의에서 민주당 상임위원장 호통 한마디에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21일 법제사법위 입법청문회에서 박성재 법무부장관이 “해병대원 특검법 불가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고 하자 민주당 소속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이 자리는 특검법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자리”라며 제지해 박 장관은 법무부가 준비한 자료를 한 줄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상임위에선 정부 등에 “당장 자료를 갖고 오라”는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14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는 민주당 의원이 법원행정처를 상대로 “(사건을) 전자 배당한 것 맞느냐” “로그인 기록을 오후 5시까지 가져오라”고 호통쳤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관련 사건 1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수원지방법원 형사 11부에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의 추가 기소 사건이 배당된 것을 따져 물은 것이다. 법원 로그 기록상 문제는 없었다. 지방자치단체에 공문 제출을 요구한 한 야당 의원은 자료 제출이 늦어지자 담당 공무원들의 10년간 재산 변동 내역과 법인카드·출장비 사용 내역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고위 공무원은 “22대 국회의 갑질은 이전과 질적인 측면에서 다르다”며 “야당이 ‘행정완박(행정권 완전 박탈)’까지 시도하는 게 그 방증”이라고 했다. 최근 민주당 민형배 의원은 정부가 시행령이나 부령 등을 입법 예고하기 전에 소관 상임위에 의무적으로 입법예고안을 제출하게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행정 권력의 핵심인 시행령 제·개정 권한까지 국회가 가져오려 하는 건 삼권분립 위배 소지는 물론 정쟁 시비도 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민 의원은 법안을 발의하면서 상위법을 위반한 시행령 예시로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설치,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 검찰 직접수사권 확대, 국정원 신원검증센터 설치 등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모두 여야 간에 이견이 첨예한 쟁점 사안들이다.

정부 공무원들은 “여당도 야당에 시달려 울고 싶은 공무원들을 괴롭게 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국민의힘이 가동하는 자체 특위에 자료를 만들어 제출한 한 공무원은 “어차피 보여주기라 내용물이 새로울 건 없지만, 국회 파행에도 정부·여당이 손발을 맞춰 국정을 챙긴다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현장 공무원들이 축나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난 19일 국민의힘 문화체육특별위 멤버들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을 방문했는데, 이 자리에는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을 비롯해 문체부 실·국장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런데 이날 특위가 현장에서 홍보한 ‘체육 활동 마일리지’ 사업(튼튼머니) 예산 확충 등은 문체부가 이미 올 초에 밝힌 내용이었다.

지난 14일 있었던 국민의힘 기후위기대응특위의 서울 관악구 도림천 방문, 지난 20일 국민의힘 재난안전특위의 서울 영등포 쪽방촌 방문 행사에도 행정안전부, 환경부, 서울시 공무원들이 투입됐다. 정부 부처가 준비하는 정책을 국민의힘 특위에서 선수치듯 발표한 일도 있었다. 지난 20일 국민의힘 재정·세제개편특별위원회가 밝힌 상속세 과세표준 구간 조정과 공제액 상향, 가업상속세제 완화, 최대주주 할증과세 정상화 등도 기획재정부가 올 7월 말 세제 개편안 발표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들이다. 일부 여당 의원은 조언을 듣겠다면서 자기가 발의할 법안 초안 작성을 사실상 정부 공무원에게 맡기다시피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한 공무원은 “현재의 용산 대통령실과 여의도 거대 야당의 ‘이중 권력’의 대치가 계속될 경우 행정력 손실이 계속 커질 것”이라며 “여야 사이에 끼여 공무원들의 눈치 보기가 만연할 공산도 크다”고 했다.

[김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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