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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밥차…‘가장 낮은 자들’을 밥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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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밥차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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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유희 ‘십시일반 밥묵차’ 대표, 지난 18일 별세)를 묻고 돌아온 6월21일은 하지였다. 하짓날, 언니는 높은 태양이 되어 하늘로 갔을까?



언니는 떠나기 전 감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여름이면 늘 감자를 쪄서 농성장 곳곳을 누비며 수박과 함께 동지들과 나누었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감자였다니 목이 메었다. 떠나는 언니에게 감자를 드리고 싶었다. 마지막 배웅하러 찾아준 동지들에게도 언니가 주는 마지막 감자와 수박을 대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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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하관식 때 동지들이 차린 음식 가운데 감자가 보인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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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젊은 시절 살기 위해 노점을 했고 노점상도 합법적으로 인정받으며 하고 싶어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 일은 쉽지 않았고 1990년 명동성당에서 한 달간의 농성이 시작되었고 그때 처음 밥을 했다고 했다. 1995년 11월 노점상을 하던 장애인 이덕인씨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길병원에서 경찰과 맞서 사인을 밝히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어 6개월간 집에도 못 가고 장례식장에서 지내야 했다. 사람들이 모였으니 밥을 먹여야 해서 장례식장 마당에 솥을 걸어 국밥을 끓였다고 한다. 유족들과 연대하러 찾아준 대학생들과 밥을 먹기 시작한 세월이 30년이라고 했다.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밥 연대는 2007년 콜트콜텍 동지들에게 밥을 하면서부터였다. 콜트콜텍 싸움은 길어졌지만 끈질기게 연대했고 그들은 끝내 공장으로 돌아가 2019년 복직 뒤 투쟁을 마무리했다. 무려 13년간의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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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연대 투쟁 때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 두번째가 고인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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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늘 말했다. “유희 밥 먹으면 무조건 이긴다. 그러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라며 동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닌 걸 나는 안다. 동지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투쟁에서 승리해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날까지 언니의 연대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쟁의 끝은 있어도 연대의 끝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그때 정확히 알았다.





1995년 이덕인 열사때 동지들 위해
장례식장 마당에 솥 걸고 국밥 끓여
거리에 나선 노동자·빈민·농민·유가족
밥으로 모시며 든든한 뒷배 되어줘





언니와 나는 부엌이 아닌 곳에서도 종종 밥을 차려야 했다. 2018년 11월, ‘비정규직이제그만’은 4박5일 서울 상경 투쟁을 준비했다. 동지들은 당시 투쟁은 자신이 있었지만, 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언니는 한데서 자는 동지들을 위해 기꺼이 하루 세끼 밥을 하겠다고 걱정 말고 투쟁하라며 동지들을 안심시켰다.



아침은 집에서 준비해 출동하고 점심, 저녁은 거리에서 조리대를 차리고 준비해야 했다. 가을날이었지만 우리는 땀나게 뛰고 또 뛰면서 밥을 지었다. 그때의 밥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밥이 아니라 어디서든 싸우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함께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약속이었다. 동지들에게 밥만 주는 것이 아닌 싸울 용기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언니였다.



또 하나는 2021년과 이듬해 새만금생명평화문화예술제에서 차린 채식 밥상이다. 생명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을 담은 예술제에서 채식 밥상 준비가 가능한지 문규현 신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선아, 신부님이 채식 밥상이 필요하다는데 어쩌지?” 하며 전화를 주셨고 나는 자신 있게 “언니, 우리가 할 수 있어요”라고 언니에게 비건 밥상을 차리자고 부추겼다. 숙소인 폐교는 부엌이 따로 없어 마당에 테이블을 깔고 준비하는 등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언니는 동지들이 원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내는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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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오른쪽)과 필자가 ‘음식 연대’ 중 유쾌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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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 밥묵차 초기에 자가용으로 ‘음식 연대’를 하는 언니에게 밥차를 마련하자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동지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땐 무슨 자신감으로 언니에게 모금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밥차를 준비하자고 6개월을 설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모금은 정체되었고 결국 언니가 나서서 페이스북에 밥차 마련을 위한 글을 올리자 동지들이 동참했고, 김의성 배우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서 마련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음식 연대’를 다니라고 마련한 밥묵차였는데 끊임없는 연대 요청으로 언니를 과로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지나고 보니 자책이 되었다.



언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는 밥과 약속이다. 늘 “밥은 하늘이다” 하면서 밥으로 동지들을 모시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언제나 약속한 일은 지켰다. 특히 몸이 아파도 약속한 밥은 꼭 해서 동지들에게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엘지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이 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던 2021년 1월1일 엘지는 건물의 전기와 물, 난방을 모두 끄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했다. 언니는 대자본의 불의에 도시락 연대 투쟁으로 맞섰다. 그때 팔을 다치고도 한 손에 깁스하고 다른 한 손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치며 도시락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언니에게 밥과 약속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



“유희 밥 먹으면 이기니 끝까지 투쟁”
이길 때까지 ‘음식 연대’ 멈추지 않아
콜트콜텍 해고자 13년만에 복직 이뤄
김의성 배우 등 모금으로 밥차 마련
“밥차는 어디든 함께 가겠다는 약속”



언니를 생각하면 챙 있는 반짝이 모자와 붉은 립스틱, 긴 손가락에 매니큐어 바른 손톱, 몸에 착 붙는 스키니 바지와 멋진 부츠를 신은 모습이 떠오른다. 앞치마를 두르기 전까지는 이분이 음식을 나누러 온 건지 알 길이 없다. 차림새만 봐서는 멋 내기에 솔찮게(꽤) 돈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곁에서 지켜본 언니는 5천원이 넘는 옷을 사는 법이 없었다. 동지들을 위한 음식 재료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선 단돈 1만원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자신에겐 늘 엄격했고 동지들에겐 사랑과 다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언니가 밥을 나눈 수많은 현장에는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이들이 있었다. 비정규직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 권리를 외치는 장애운동가, 자식을 잃고 거리의 투사가 된 부모, 생존권 투쟁을 벌이는 거리의 노점상과 빈민, 논과 밭 대신 아스팔트로 나선 농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공기 같은 존재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잊기 쉬운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을 귀하게 밥으로 모신 사람이 유희 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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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오른쪽)과 필자가 밥차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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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인 언니는 자신의 병을 알고 3일간 기도 후 자신은 살면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아 이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며 내게 한 당부가 있었다. 2022년 11월 초 오스트레일리아로 은혜(발달장애 작가)와 떠나야 했던 내게, 다녀오는 동안 은혜 불안하지 않게 티 내지 말고 지내다 오라는 당부였다.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자신보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배려가 남달랐던 사람이다.



언니는 ‘너 이제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까? 언니 이젠 편히 쉬세요. 나의 자랑, 나의 사랑 유희 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성미선/팔당식생활연구소장·십시일반 밥묵차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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