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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가족이라고 못 봐줘'… 유류분 이어 친족상도례도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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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가족화·경제 성장 등 사회 환경 크게 변해
자정 노력으론 친족 간 재산 범죄 해결 난항
가족 간 재산 문제에 국가 개입 필요성 열어
한국일보

방송인 박수홍(오른쪽)과 그의 어머니. SB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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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않는다.

국회가 1953년 형법에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를 제정하면서 따른 로마법 격언이다. 국가가 가족 간 재산 문제에 개입했다가 오히려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한국의 공동체 가족주의 정서가 입법 취지에 반영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법 제정 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핵가족화했고, 이제는 1인 가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5촌 이상의 친족 또는 인척 간 교류도 축소됐다. 사회가 변화하는 동안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1953년 477억 원이었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401조 원(이달 집계 기준)까지 늘어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기엔 재산 범죄로 인한 피해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는 얘기다.

헌재가 27일 친족상도례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도 이처럼 변화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가족 간 자정 노력만으로는 친족 간 재산 범죄로 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인 것이다. 실제 방송인 박수홍의 친형 부부가 2011년부터 2021년까지 박씨의 출연료 등 거액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자 박수홍 부친은 큰아들이 아닌 자신이 횡령을 했다고 주장해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부친이 횡령한 경우 친족상도례 대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법 조항을 악용하려는 의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날 "생명, 신체,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해를 포함하지 않은 재산범죄의 경우, 가족과 친족 사회 내에서 자율적으로 손해를 회복하고 화해와 용서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효율적 분쟁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친족상도례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다만, "현행법은 넓은 범위의 친족에 대해, 재산범죄 불법성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묻지 않고, 피해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형 면제'를 하고 있어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 진술권이 형해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족상도례의 기초가 된 로마법 체계를 받아들인 국가들과 비교해도 현행법은 처벌이 너무 어렵다는 점도 위헌 판단의 근거가 됐다. 프랑스는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물품에 대한 경우나 가해자가 후견인 등이면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지 않는 등 친족 간 재산범죄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자정적 변화만 기대해선 안 돼"

한국일보

방송인 박수홍의 출연료 등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의 친형(오른쪽)과 배우자 이모씨가 올해 5월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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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선 국가가 사회 변화에 따라 가족 간의 재산 문제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할 필요성을 헌재가 인정한 대목을 특히 주목한다. 앞서 헌재는 올해 4월 유류분(배우자·자녀·부모·형제 등에게 보장된 최소한의 유산 상속분) 관련 민법 조항에 대해 46년 만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는데 당시에도 가족 간 재산분쟁 격화 추세와 핵가족의 일반화 등 사회 변화를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내세웠다. 이창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가족에서 개인주의화하는 사회 분위기와 실질적인 가족의 의미를 따지는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며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하는 형사소송법 조항 등도 헌재의 심판 대상이 되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번 결정으로 친족상도례 사건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종결하는 종전의 수사와 재판 관행에도 변화가 있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상속 전문인 박수홍의 법률대리인 노종언 변호사는 "가족 간 범죄는 은밀하고 계속적으로 죄책감이 결여된 상태로 발생해 결과가 참혹한 경우가 많은데도 처벌하기 어려웠다"며 "수사기관이 이제는 적극 수사를 해야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박씨의 친형 사건 1심 재판부가 '가족회사'라는 이유로 형량을 감경했던 것도 항소심에서부터 바뀔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헌재가 친족상도례 관련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만큼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친족상도례 적용 대상 △범죄 피해 규모에 따른 친족상도례 적용 여부 등이 향후 개정법안의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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