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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대통령과 동해 석유…과학의 언저리에서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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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에 참석해 동해 석유·가스 매장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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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브리핑’을 통해 동해에서 석유와 가스가 나올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을 과학의 효용을 입증하는 사례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석유라는 의제가 떠오르면서 바다 밑 지질구조를 탐구하는 과학이 ‘국정’의 중심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학은 익숙해서 간과했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달과 은하의 과학이 그랬듯이 바다 밑 지층의 과학도 우리의 눈을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돌린다.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고, 개척과 탐사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기후위기 속에서 석유에 대한 환호가 웬 말이냐는 비판까지 포함해서, 동해의 지질과 석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많이 늘어날 것이다. 석유의 과학은 국토의 언저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확 바꿔 놓는다.



물론 석유 과학과 국정의 연결을 좋게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석유 매장 가능성에 대한 대통령의 발표를 신뢰하는 국민의 비율이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 평가하는 비율과 비슷하게 나온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가 눈에 띈다. 과학에 대한 신뢰와 정치에 대한 신뢰가 연동되고 있다. 설마 대통령이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조사 결과를 첫 ‘국정 브리핑’ 소재로 삼았을 리는 없을 텐데, 대통령의 정치력을 신뢰하는 사람만큼만 그의 석유 과학 브리핑을 신뢰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통령 말고 과학자가 발표했다면 달랐을까. 이 사안에서 과학은 사회적 합의와 신뢰의 바탕이 되기는커녕 인기에 목마른 정치인이 급하게 던져보는 말과 구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대통령이 과학을 오용했거나 과학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오염되는 비정상적 사례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다. 오직 과학만 바라보고 정상적인 과학 활동을 하는 과학자에게는 이런 오용과 오염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 그 자체에 진심인 과학자라면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과학 언저리의 소동일 뿐이다. 석유 과학 소동보다 더 격렬하게 한국 과학계에 영향을 미친 연구개발 예산 삭감 조치를 과학 바깥의 정치권력이 한국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일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과학은, 즉 과학 지식이나 과학적 방법은, 그 언저리의 것들과 얽히지 않은 채 순수하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처음 과학을 동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과학 언저리’라는 간판을 걸고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나는 언저리의 소동에 무심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과학은 결코 이루지 못할 이상이나 보기 드문 예외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다. 과학과 그 외부의 연결에 관해 쓰겠다는 나의 포부도 실은 과학에는 중심과 언저리가 나뉘어 있고 과학을 과학이게 하는 것은 그래도 중심에 모여 있다는 허술한 전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는 중심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고 싶을수록 오히려 언저리를 살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저리가 중심을 규정한다. 지금의 과학은 언저리에서 발생하는 교란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중심을 지켜낸 결과가 아니다. 언저리의 역동적 변화가 2024년의 한국 과학을 2024년의 미국 과학이나 1974년의 한국 과학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과학을 구성한다. 말하자면 대통령과 그의 권력도 과학의 일부다. 탐탁지 않을지라도 그렇다. 반대로 우리가 생산하는 과학도 대통령이 수행하는 국정의 일부가 된다. 오용이나 왜곡이라고 느끼더라도 그렇다. 대통령 말고 과학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아니라 가치나 이념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과 양방향으로 얽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저리에서 과학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과학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한다.



과학의 언저리가 둥글고 매끄럽지 않으며 오히려 모나고 울퉁불퉁하다면 그건 과학이 살아 있으며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언저리가 복잡한 과학일수록 부대끼고 닳으면서 그 과학이 연구의 대상이자 기반으로 삼는 세계와 접점을 만들어 낸다. 언저리야말로 실제로 작동하는 과학,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과학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학의 언저리에 관해 쓴다는 것은 과학의 뒷얘기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과학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는 일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만한 자신은 없었다.



*그동안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를 사랑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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