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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이슈 김정은 위원장과 정치 현황

[인터뷰]권오곤 "국정원 시긴트, '김정은 기소' 증거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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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곤 前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총회 의장

"북한 책임 규명 위해 세밀한 자료 축적해야"

"가치 공유하는 국가들과 외교력 발휘 중요"

1999년 5월, 국제사회는 사상 처음으로 '현직' 국가 원수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발칸의 살육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을 기소했다. 참혹한 내전에서 반인도 범죄와 '인종청소'라는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혐의였다. 2002년 2월 시작된 '세기의 재판'에서 저울의 추를 쥔 법관 중 한 명은 권오곤 당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상임재판관. 훗날 국제형사재판소(ICC) 당사국총회 의장까지 오른 그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장기간 국제재판관으로 활약한 기록을 남겼다.

언젠가 국제사회는 또 하나의 '독재자'를 심판해야 한다. 수많은 주민을 착취하고 자의적으로 고문·처형하는 범죄를 3대에 걸쳐 이어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그의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지난 26일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연세대 국제학대학원이 '북한 강제실종 범죄에 대한 대응'을 주제로 연 국제회의에서 권오곤 전 의장을 만났다. 밀로셰비치부터 라도반 카라지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까지, 전범과 독재자의 범죄를 판단해온 그의 의견을 구했다.

'김씨 일가' 책임 규명, 세밀한 '증거 축적'이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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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곤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당사국총회 의장이 26일 서울 연세대에서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연세대 국제학대학원이 '북한 강제실종 범죄에 대한 대응'을 주제로 연 국제회의에서 축사하고 있다. [사진제공=전환기정의워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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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 문제에는 김씨 일가와 이를 떠받치는 노동당이라는 '가해 주체'가 있다. 유엔과 국내외 수많은 비정부기구(NGO)가 개선을 권고하고 있지만,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김정은의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증거 수집'이 핵심이다.

권 전 의장은 "지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김정은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축적'하는 것"이라며 "고위 탈북민이나 내부자(insider) 증언을 치밀하게 조사·기록하는 것은 물론, 연결 증거(linkage evidence)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자행한 범죄가 최고지도자의 '지시' 내지는 '용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권 전 의장은 이를 '퍼즐 게임'에 비유했다. 범죄가 발생한 현장으로부터 지휘체계를 타고 올라가 김정은까지 책임 규명이 연결될 수 있도록 '조각'을 모으라는 것이다.

이런 민감한 대북 정보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정보기관이다. 그는 '국가정보원이 보유한 시긴트(SIGINT·신호정보) 등도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국정원이 북한 지도부에 대한 도·감청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면, 훗날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그가 유고 사건을 맡았을 당시 보스니아 측이 전쟁 도중 도청한 카라지치의 통화 내용, 미 중앙정보국(CIA)이 촬영한 '집단매장지' 위성사진 등이 주요 증거로 활용됐다.

이런 맥락에서 권 전 의장은 정보기관의 역할을 몇 가지 더 짚었다. 그는 "탈북민에 대한 일차적 조사, 외교사절을 통한 정보 수집도 있겠지만, 미국 등 우방국과의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며 "밀로셰비치 사건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는 미국이 촬영·공개한 위성사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진이 공개된 뒤 매장된 시신들을 다른 곳에 옮겨 묻자, 미국은 그 정황이 담긴 위성사진을 또 촬영했다"며 김정은을 형사재판에 세우는 데 우주·위성 기술까지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北 책임 규명 기구…"외교력 발휘가 주요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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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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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C는 제노사이드(집단살해)와 반인도·전쟁·침략 등 4가지 범죄를 관할한다. 북한은 모든 조건에 부합할 것 같지만, 당장 김정은을 기소할 순 없다. 북한은 ICC 구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 협정'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CC 관할국이 아니어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회부할 순 있다. '김정남 암살 사건' 당시 우리 정부는 김정은 등 북한 지도부를 제소해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결의안까지 상정하진 못했다. '뒷배' 중국과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한 안보리를 통한 회부는 쉽지 않아 보인다.

권 전 의장은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북한의 반인도 범죄를 알리는 보고서를 낸 지 10년째, 우리는 중요한 발전을 목격하고 있다"고 짚었다. 인권침해 범죄 증거를 분석하고 국제재판소에서 사법적 책임을 따져볼 수 있도록 보고서를 작성할 '구체적' 권한을 가진 독립기구가 생겼다. 시리아 책임규명 기구(IIIM)와 미얀마 책임규명 기구(IIMM)다. 대북제재 이행을 감시하던 '전문가 패널'이 러시아에 의해 무산된 상황, '책임규명' 권한을 부여한 새 감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권 전 의장은 '가치 외교'를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가 외교력을 얼마나 발휘하는지도 중요한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리아·미얀마처럼 북한에 대해서도 책임규명 기구가 만들어지려면 유엔 총회 또는 인권이사회에서 많은 회원국의 지지가 필요하다"며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공감대를 넓히고 영향력을 키우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가치 공유하는 국가들에 영향력 키워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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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연세대 국제학대학원이 26일 서울 연세대에서 '북한 강제실종 범죄에 대한 대응'을 주제로 연 국제회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권오곤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당사국총회 의장과 이정훈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장, 백범석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민용준 유엔 국제형사재판 잔여업무처리기구(IRMCT) 법무관, 패트릭 볼 인권데이터분석그룹(HRDAG) 연구디렉터, 외교부·법무부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사진제공=전환기정의워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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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전 의장은 "이제 한국도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내기 시작했다"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의장이던 시절, ICC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내 전쟁범죄 혐의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은 파투 벤수다 당시 ICC 검사장 등에 제재를 가했다. 동맹국을 건드리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이에 권 전 의장 주도로 반발 성명이 나왔지만, 정작 한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과 가장 끈끈한 동맹이지만, 차이가 생겼다. 2016~202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이끈 요시 코헨 당시 국장이 벤수다 검사장을 협박한 정황이 드러났고,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이 청구됐다. 이 문제로 ICC 회원국 124곳 중 93곳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외압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한국도 이름을 올렸다. 미국이 반발해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권 전 의장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행동을 같이한다는 걸 '꾸준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권오곤 전 의장은 누구?

1953년 9월 충북 청주시 출생. 1976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사법시험(19회·연수원 9기)에 합격했다. 동 대학원과 미 하버드 법대에서 각각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22년간 서울지법·수원지법·대구고법 등 각급 법원에서 판사와 부장판사로 근무했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유엔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상임재판관을 지냈고,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국제형사재판소(ICC) 당사국총회 의장을 역임했다. 국제재판관으로 활약한 기간만 21년이다. 현재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김앤장 법률사무소 국제법연구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6월 대법원 사법정책자문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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