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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청계광장]결핍과 무능력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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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인간에게 유아기는 흥미로운 시간이다.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일종의 기억상실과 같은 단절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겪었지만 기억의 형태로 내면화되지 않은 시간이다. 유아기의 경험들이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그때 아이에겐 아직 언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들이 막 말을 배우던 즈음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언어는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데 사용한 언어능력이라는 것도 단순히 언어의 유무를 평가한 것이라기보다 소통을 위해 언어를 갖출 수 있는 능력, 즉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이성을 지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언어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오히려 동물들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울음들, 소리들로 그들은 서로 소통한다. 그들에게 언어는 그들의 몸에 장착돼 자동적으로 발현되는 본능과 같다. 반면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기에 기억 저편의 잔여물로 유아기를 남기며 언어를 습득해간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언어가 아니라 결핍이며 언어는 그 결핍을 채울 가능성을 실현한 결과다.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줬다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라는 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 때문에 3만년이나 바위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런데 사실 제우스가 그런 벌을 내린 것은 불을 도둑질해서만은 아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접두사 'pro'(프로)처럼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또는 '앞서서' 아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로서 그는 제우스가 아들에게 배신당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의리와 저항의 아이콘답게 그는 제우스의 추궁에도 그 아들 관련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 인간과 동물들을 형과 함께 만든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반대로 '뒤에'(epi) 생각하는 자였다. 에피메테우스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뒤를 볼 줄 몰랐기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동물들에게 모든 능력을 나눠준 것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 날 수 있는 능력, 수영하는 능력, 잘 볼 수 있는 능력, 사냥하는 능력 등 동물들은 각각 고유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막상 인간의 차례가 왔을 때 남은 능력이 없었다. 그저 능력의 결핍뿐.

프로메테우스는 지식의 수호자로 불린다. 그가 준 불이 인류문명과 세상 모든 지식의 기원이 됐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의 앞서 생각하는 능력, 즉 예지력 때문에 그렇다. 앞을 내다보기는커녕 나중 생각을 하지 못한 에피메테우스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열등하진 않다. 프로메테우스의 보상, 즉 고기를 익혀 먹고 사물을 밝힐 수 있는 불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됐다. 수영하는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지만 수영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날카로운 발톱을 타고나지 못했지만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동물이 본능적 해결책으로서 지식(knowledge)을 가졌다면 인간은 지식의 가능성(knowledge-ability)을 갖게 됐다. 인간에게 무능력과 결핍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에필로그: 항상 갖고 있던 것,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의 진가를 깨닫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공도, 행복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좌절의 시간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무능력이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며 그것은 희망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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