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남북체육·적십자회담 담긴 문서 공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정치 분야 내용 담겨
버마 테러 후 북한 체육회담 제안...3차회담 후 성과없이 종료
수해물자 인도 계기 남북회담서 이산가족 첫 상봉 성과
통일부는 1981년 1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인도주의 협력과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1693쪽을 2일 일반에 공개했다. 2022~2023년 총 네 차례에 이어 이번이 다섯번째 남북회담문서 공개다.
1985년 제1차 이산가족 상봉 당시 모습(사진=통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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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는?” 아웅산 테러 사건에 北 ‘적반하장’
북한이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제안을 하면서 남북은 1984년 4월 9일 판문점에서 만나 제1차 체육회담을 진행한다. 남측은 전년 버마 폭탄 테러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고, 북한은 ‘광주사태’ 등을 언급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문서에 따르면 남측은 “귀측이 진정으로 단일팀 구성과 남북 체육교류를 바란다면 북한 당국은 마땅히 (테러사건에) 사죄를 하고 앞으로 결코 이러한 동족살상과 납치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내외에 명백히 해야 할 것”이라고 북측에 사과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이미 명백히 천명한 바와 같이 양곤 사건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양곤 사건과 같은 정치 문제를 개입시키는 것은 체육 문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고 회의록에 작성돼 있다.
또 북측은 “우리로서도 양곤 사건은 물론 광주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문제를 가지고 할 말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며 “겨레의 원한이 사무쳐있는 피비린내 나는 광주사태야 말로 사상유례 없는 민족백정 행위이며 온 겨레와 인류가 규탄하는 가장 처참한 대학살 만행이었다”고 맞대응했다.
북측은 남측이 회담 당일에 판문점 일대에 ‘삐라’(대북 전단)를 뿌리는 ‘도발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같은 남북 간의 의견차이로 1차 체육회담은 양측간의 제의만 하고 끝마쳤다. 이후 남북은 3차회담까지 진행했지만, 북한이 4차회담 일자를 주지 않고 거절하면서 23회 LA올림픽 대회 남북한 단일팀 출전하기 위한 체육회담은 성과없이 끝났다.
1985년 12월 제10차 적십자 본회담으로 한국을 방문한 북한기자들이 명동 관광을 하고 있다.(사진=한국정책방문원) |
수해물자 인도 계기 이산가족 첫 상봉 이뤄져
1984년 9월 9일 북한적십자가 홍수 피해를 입은 남한 수재민에 물자 지원을 제안했다. 당초 거절할 것이라는 관측과 달리, 정부는 적극적인 자세로 북측에 대처하자는 방면으로 뜻을 모으고 대한적십자사(한적)를 통해 북한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후 남북 직통전화가 재가동했고, 적십자 본회담이 재개되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협상도 이뤄졌다.
남북은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남측 합의문 제목)’이라는 내용으로 인적 교류를 했다. 또 10차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하며 남북의 교류가 활기를 띄었다. 남북은 상봉하는 이산가족의 수, 예술단의 수, 기자단의 수와 프로그램까지 치열하게 논의했다. 결과적으로 남북은 각각 50명씩 총 100명의 이산가족 상봉을 타협한다.
당시 북측이 남측이 제안한 롯데백화점, 63빌딩(대한생명빌딩) 등 관광 일정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문서는 “남측의 참관지 선정 문제와 관련 롯데백화점 쇼핑을 피하는 대신 고궁, 공연 영화관람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해 12월 본회담에서는 남한의 요청을 받아들여 결국 백화점을 방문했다.
북측에서는 공연 후에 기립박수를 하지 않는 남한을 비판하기도 했다. 북측은 “1차 공연시 수백명의 예술인과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는데 남측의 5명만이 그냥 앉아있었다고 말하면서 예의와 도덕이 없다”고 우리 측에 의견을 전달했다.
이번 남북회담 공개 문서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1982.1)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1983.10) 및 북한의 3자회담 제의(1984.1) △남북한 체육회담(1984.4~5) △남북한 수재물자 인도·인수(1984.9~10) △제8~10차 남북적십자회담(1985.5∼12)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1985.9)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포함됐다.
이호령 남북회담 문서 공개 예비 심사위원(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장)은 “1990년대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오기 전에 남북 간 초창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며 “북한이 당시에는 남북한 각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자고 강조하는데, 김일성 시대에는 남한 지역의 여러 곳을 가서 사상문화 지령을 직접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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