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 20년 만에 새 지폐 3종 발행
1만 엔권에 들어간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근대 경제 아버지... 사상 배우자"
광복회 "식민 지배 정당화 행위" 비판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3일 일본 도쿄 일본은행 본점에서 새로 발행한 지폐를 소개하고 있다. 우에다 총재 뒤에는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 침탈의 주역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들어간 새 1만 엔권 지폐가 전시돼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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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일제강점기 한국 경제 침탈의 주역인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를 최고액 화폐인 1만 엔(약 8만6,000원)권의 새 얼굴로 교체했다.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한국에는 대한제국 시절 경제 개혁을 빌미로 치욕을 안긴 인물이다. 일본 사회에서는 새 지폐 발행에 맞춰 '시부사와 다시 알기' 바람이 불고 있어, 수탈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역사관이 퍼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제일국립은행 경제 침탈 전초기지로 조선에 세워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3일 새 지폐 발행 기념식을 열고 새로운 1,000엔(약 8,600원)권과 5,000엔(약 4만3,000원)권, 1만 엔권 등의 유통을 개시했다. 2004년 이후 20년 만에 새 지폐 3종을 발행한 것이다.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최초로 해외 유학을 떠난 여성 교육의 선구자 쓰다 우메코, 1,000엔권에는 일본 근대 의학 기틀을 만든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의 초상을 각각 새겼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일본은행을 방문해 "일본의 자본주의, 여성의 활약, 과학기술 혁신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시대에 걸맞은 새 지폐"라고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신형 1만 엔권 인물인 시부사와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관료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그는 일본 내에서는 '근대 경제 개발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1840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논어' '대학' 등 고전을 익혔고, 27세에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를 시찰해 유럽 자본주의를 체험했다.

일본 재무성이 2019년 4월 8일 공개한 새 지폐 도안 견본들. 1,000엔 권에 의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5,000엔 권에는 근대 여성 교육 개척자 쓰다 우메코, 1만 엔권에는 사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 초상이 각각 들어갔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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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메이지 신정부에서 경제 관료를 맡으며 조세·화폐·회계 개혁을 주도했다. 1873년에는 상업 부흥을 위해 관직을 떠나 500곳 이상의 기업을 설립하거나 경영에 관여했다. 일본의 최초 은행인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을 설립했고, △도쿄가스 △도쿄증권거래소 △데이코쿠호텔 △기린맥주 등 회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시부사와 책 사서 공부 다시 하는 일본인들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다. 제일국립은행을 조선에 진출시켜 당시 조선 경제를 일제 치하로 편입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1902~1904년 조선에서 제일국립은행 지폐를 발행해 유통했는데, 지폐에 자신의 초상화를 새겨 넣었다. 1901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 경부선 철도 노선을 부설해 한반도 자원 약탈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 사장도 맡았다.

이상현 태인 대표 겸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가 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태인 사무실에서 1902∼1909년 발행된 일본 제일은행권(맨 왼쪽)과 이달부터 발행하는 일본 1만 엔권 견본을 비교해 설명하고 있다. 두 지폐에는 과거 한반도 경제 침탈에 앞장선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담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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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부사와의 '식민지 수탈' 행적에도 불구, 일본 내에서는 새 1만 엔권 초상을 둘러싼 논란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부사와 사상을 배우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도쿄 서점 곳곳에서는 경제 활동·도덕의 양립을 강조한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도쿄 신주쿠 대형 서점이 1층에 '시부사와 코너'를 마련했을 정도다.

일본 NHK방송은 "새 지폐 발행을 계기로 시부사와 사상이 퍼지고 있다"며 "지난주 '논어와 주판' 판매량은 전주 대비 8배 정도 증가했다"고 전했다. 지난 1일 한국 광복회가 성명을 내고 "일제 침탈 장본인의 화폐 인물 결정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기만적 행위"라고 비판했으나, 일본 사회에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도쿄= 류호 특파원 h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