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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설리번 선생 마음으로 참고서 40년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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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기중 키출판사 대표를 최근 서울 도곡동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실용서적이야말로 밥과 꿈을 동시에 이뤄주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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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중 키출판사 대표(74)는 최근 첫출근한 편집자와 미팅을 했다. 그가 수기(手記)로 적어 신입에게 들려준 수첩에는 '헬렌 켈러' '설리번'이란 영단어가 정갈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설리번이 헬렌 켈러에게 가르친 첫 단어는 '물(water)'이었잖아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소녀에게 오직 그 하나의 단어를 가르치려 얼마나 무수한 생각을 했겠어요. 학습참고서 시장에서 일하는 출판인들 마음은 설리번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마음으로 40년간 걸어왔습니다."

서울 도곡동에 위치한 키출판사는 40년 전통의 업력을 지닌 잔뼈가 굵은 출판사다. 매해 20~30종, 40년간 출판한 책은 대략 1000종쯤. '매3비(매일 지문 3개씩 푸는 비문학)'를 필두로 '매3문(문학)' '매3영(영어)' 등 '매3' 시리즈가 극강의 효자 상품이다.

이날 창립 40주년을 맞아 도곡동 본사에서 만난 김 대표는 "장수 베스트셀러는 사실 수없는 실패의 결과였다"고 회고했다.

"한 권의 책을 찍는다는 건, 확정적 부채가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집필, 편집, 종이, 인쇄 등 뭐 하나 비용 없이 이뤄지는 게 있겠어요. 그래서 '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대원칙은 출판사가 돈만 좇아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물질적 풍요도 정신적 산물이란 생각에서 출발해야죠."

1984년 창업한 회사는 그해 태어난 첫째 아이가 나이 마흔이 되기까지 같은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일등 아니면 서럽기만 한 출판계, 그는 생존에 성공했다. "40년 전 그때만 해도 정말 '맨주먹'이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출판사 수가 2700개로 제한된 상태여서 창업하려면 택시 면허 사듯 돈 주고 구해야 했어요. 300만원쯤 했는데 그조차 없어 빌려서 출발했죠.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화교환원을 대상으로 펴낸 '표준전화영어'가 첫 책인데 미대 나온 아내가 디자인을 해줬습니다. 제겐 보물 같은 책이지요."

키출판사는 '1980년대 출판계 총알배송'의 원조이기도 하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20~30명 뽑아두고 독자가 전화하면 '2시간 내 배송'을 원칙으로 삼았다. 책값 7600원 중 1000원을 배송원 몫으로 떼줬다. 독자도, 대학생도 몰려들었다.

"밑지진 않았어도 큰 지출이었죠. 그래도 독자 서비스에 충실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발상이었습니다. 그게 1985년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해외 기업 아마존이 '책 총알배송'으로 커졌더라고요. 키출판사가 아마존보다 10년쯤 앞섰으니 우리가 원조 아니겠어요? (웃음)."

인고의 세월을 거쳐 이제 키출판사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지사를 둘 만큼 커졌다. 해외 교과서를 연구하는 300명 규모의 수학연구소 창립은 김 대표의 다음 바람이다.

중국 신동방, 대만 코스모스, 태국 등에도 수출된 '미국교과서 읽는 리딩' 시리즈는 키출판사의 글로벌 대표작이다. 미국교과서를 각 나라의 언어로 직접 읽어볼 수 있어 호응이 크다.

"키출판사는 오랜 팬층이 많아요. 최근 노문과(러시아문학과)를 전공한 편집자에게 러시아 수학교과서를 전부 번역하게 했습니다. 단순 번역만 하지 말고 부분별로 코멘트를 해달라는 요청도 함께요. 해외 교과서에서 본받을 점을 공부해 보자는 건데 독자분들이 이런 시도에 호응해 주세요."

서점에 가면 책은 두 갈래로 나뉘는 것만 같다. 하나는 인문서나 사회과학서, 소설이나 시집과 같은 부류다. 이들은 일견 '고고하게' 보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구체적 꿈을 성취하게 해주는 책은 형이상학적이거나 고고한 책이 결코 아니다. 학습참고서를 포함한 실용서적 없이 꿈의 성취는 불가하다.

"밥이 있어야 꿈을 꿀 수 있다"고 김 대표는 주장한다. 밥과 꿈은 길항한다는 것.

"사람이 밥만으로도 살 수 없지만 꿈만으로도 살 수 없잖아요. 밥을 현실이라고 보고, 꿈이 이상이라고 볼 때 둘은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 것 같아요. 밥이 해결돼야 꿈을 꿀 수 있고, 꿈을 꾸어야 그게 단순한 밥을 넘어 더 높은 이상으로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40년간 일해보니 실용서적은 밥이면서, 동시에 꿈이었어요. 꿈을 밥으로 바꿔주는 건 결국 '모든' 책입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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