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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단독]‘시청역 참사 희생자’ 서울시 공무원의 마지막 출근길…“우리 중 가장 먼저 가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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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좀 특별해예. 태어날 때부터 고난을 겪던 애야. 우유 먹일 돈도 없어서 갓난아기 때 볕에 말린 백설기 끓인 죽 있잖아. 미지그리한 게 뭐 맛은 없는데 그리 컸어요.”

시청역 역주행 참사 희생자 김인병 씨(52·서울시 사무관)의 맏형 김윤병 씨(67)가 4일 인병 씨의 장지인 경기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동아일보 기자에게 말했다. 인병 씨 가족은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안동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생계에 뛰어들어 7남매를 길렀다. 형제의 첫째·둘째 누나도 공장을 다니며 나머지 5형제를 먹여 살렸다.

이날 기자는 인병 씨의 빈소부터 발인, 화장까지 유족과 동행했다. 윤병 씨가 다시 말했다.

“어머니가 인병이를 40대 중후반에 낳았다. 내가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안동 시내에서 4시간 걸어서 집에 돌아오니 큰어머니가 ‘너그 엄마 너 오늘 못 볼 뻔했다. (노산이라 위중해) 엄마를 못 볼 뻔했는데 너 엄마가 살아났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병 씨의 빈소엔 하루 평균 1500명의 조문객이 찾아왔다. 시청의 동료 직원들은 물론, 유족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람도 빈소를 찾아 김 씨를 추모했다. 윤병 씨는 “경북 영양군 직원들이 심히 흐느끼면서 조문을 와 무슨 연유인지 물어봤는데, 서울시청 광장에서 잠시 특산물을 판매하는 행사를 했을 때 너무 친절하게 업무 협의를 해줬었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탈북 청소년 학교 ‘여명학교’의 교장 조명숙 씨(54)도 인병 씨의 사망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3일 오후 11시 40분경 버선발로 빈소에 뛰어왔다. 서울에 있는 유일한 탈북학교인 여명학교는 2019년 서울 은평구 은평뉴타운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높은 임대료에 새 보금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 때 인병 씨가 나섰다고 한다.

조 씨는 “지난해 1월 서울시 남북협력팀장이었던 김 씨가 추운 겨울 난방도 잘되지 않는 학교에 직접 찾아와 탈북 아이들이 폐교돼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을 보았다”며 “김 씨가 조례를 고치는 것을 추진해서 임대료가 5분의 1 수준으로 경감돼 지금의 자리(폐교된 염강초등학교)로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인병 씨는 학교가 멀고 무연고인 탈북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도 마련되도록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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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김인병 씨(52)가 탈북 청소년 학교 ‘여명학교’를 도운 뒤 교장 조명숙 씨(54)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 조명숙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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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씨는 지난해 감사하다는 취지의 편지를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썼고 이를 본 오 시장이 인병 씨가 소속된 팀을 격려하기 위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조 씨는 “공무원 사회에서 너무 귀감이 될 분이라 뉴스를 접하자마자 인천에서 장례식장으로 곧장 달려갔다”고 했다.

4일 오전 5시 40분경 인병 씨를 태운 운구차는 발인을 마치고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을 출발해 인병 씨의 생전 근무지였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검은 옷을 갖춰 입은 시청 직원 80여 명이 광장에 나와 운구차를 맞이하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자 유족들은 다시 울음을 참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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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경 김인병 씨(52)가 시청 내 보직 중 83명의 팀장이 된 후 말한 카카오톡 대화 내용. 김 씨는 팀장임에도 평소 팀원들보다 더 늦게까지 일을 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동료 직원들은 입을 모았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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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형 김광병 씨(57)는 “동생은 굉장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오형제가 다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철없는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면서도 “이번에 상을 치르며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을 해내고 덕망을 쌓아왔더라”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오전 6시경 차에서 내려 인병 씨의 둘째 딸 김신영 씨(20)가 든 영정 사진을 따라 인병 씨의 마지막 출근길을 함께 했다. 둘째 딸은 자신이 영정 사진을 꼭 들고 싶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들에 따르면 김 씨는 생전 둘째 딸이 대학에 합격하자, 그 대학의 대학원 석사 과정을 등록할 정도로 딸을 사랑한 아버지였다.

인병 씨를 운구하는 행렬은 시청 1층 로비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차에 올라 서울시립승화원으로 향했다. 둘째 누나 김점늠 씨(72)는 “시청 직원분들이 동생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배웅해 주니 정말 감동적이고, ‘동생이 잘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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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병 씨의 운구 행렬이 서울시청으로 들어가고 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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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병 씨의 운구 행렬이 서울시청으로 들어가고 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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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7일 김인병 씨(52)가 둘째 딸이 다니게 된 대학교에 석사 과정을 시작한다고 말하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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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 따르면 인병 씨는 중학교 때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다 지나가던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왼쪽 팔을 크게 다쳐 1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책과 도장 등을 파는 외판원과 전기장판을 까는 일을 했다. 인병 씨는 공무원이었던 형들을 따라 시험을 준비했고, 공직 입문 후 능력을 인정받아 서울시 5급 사무관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다시 겪게 된 교통사고로 이날이 마지막 출근길이 됐다.

인병 씨의 남매들은 “공무원이었던 형들을 따라 공무원이 된 동생이 이제 보니 일을 가장 잘하더라.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열심히 시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일한 동생이 부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라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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