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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넘사벽' 일본 배구 "차원이 다르네"… 한국은 왜 '동네북'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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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일본 남녀 배구 세계선수권 동반 준우승
한국은 전패 수모에 1부 리그도 못 들어
여자 고교 배구팀 한국 17 vs 일본 3852
선수 부족해 기본기 전술 익히기 어려워
일본은 '부카츠' 통해 즐기는 스포츠로
"지금 상태로는 절대 일본 배구 못 이겨"
학교 스포츠 활성화·생활체육 강화 필요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 배구 못 이깁니다.

4일 국제배구연맹(FIVB) '2024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결과를 얘기하던 김상균 한국초등배구연맹 수석부회장의 목소리에 착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김 부회장은 서울수유초등학교 배구팀 감독으로 37년째 유소년 배구부를 지도하고 있는 베테랑 지도자다. 그는 갈수록 세계 무대에서 뒤처지는 한국 배구를 지켜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다.

한국 여자 대표팀은 올해 VNL에서 16개 참가팀 중 15위를 기록했다. 남자 대표팀은 실력이 떨어져 대회에 참가조차 못 했다. 김 부회장은 "한국은 스포츠 인재 육성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세계 경쟁력을 잃었다"며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비슷했던 일본은 이제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이 됐고,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강' 일본 배구, '동네 북' 한국 배구

한국일보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지난달 12일 일본 후쿠오카 마린메세에서 열린 VNL 3주 차 1차전에서 일본 여자 배구 대표팀의 공격을 방어하는 모습. 이날 한국은 일본에 세트 점수 0대 3으로 완패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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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을 유소년 지도자로 살아온 김 부회장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일본 배구는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팀으로 꼽히고 있다. 올해 VNL 대회에서 일본 남녀 대표팀 모두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잇따라 격파하며 동반 준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남자 대표팀의 경우, 역대 아시아 국가 최고 성적을 내며 일본 배구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반면 한국 배구는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남자 대표팀은 일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력 차가 크다. 세계에서 배구를 가장 잘한다는 16개국이 참가하는 VNL에서 일본 남자 배구는 2022년 5위, 지난해 3위에 이어, 올해는 준우승까지 차지하며 '깜짝 성적'이 아님을 보여줬다. 한국 남자 배구는 2018년 최하위(1승 14패)로 강등된 뒤 VNL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1부 리그에서 최정상급 성적을 내고 있다면, 한국은 2부 리그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노는 물 자체가 달라진 셈이다.

한국 여자 대표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VNL 출전 기회는 얻었지만, 경기력은 세계 수준에 크게 뒤처지며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2022년과 2023년에는 전패를 기록하며 최하위에 머물렀고, 올해도 16개국 중 15위에 그쳤다. 특히 10번의 패배 중 9번은 단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한 채 3대 0으로 졌다. '김연경 신화'에 취해 있던 한국 배구가 '동네 북'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유소년 선수층부터 하늘과 땅 차이

한국일보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위)이 지난달 16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지뉴 체육관에서 열린 2024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1주 차 2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세트 점수 0대 3으로 패한 후 아쉬워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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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라이벌 관계였던 한국과 일본의 배구 실력은 왜 차이가 생긴 걸까. 목포여상 배구부 정진 감독은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차이가 스포츠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스포츠 경쟁력의 뿌리가 되는 유소년 체육이 무너지면서 성인 대표팀 실력까지 낮아졌다는 것이다.

일본은 탄탄한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기반 위에 엘리트 선수를 키워내고 있다. 부카츠(部活∙운동부 활동)로 불리는 학교 운동부 문화가 대표적이다. 일본 중고교에는 우리처럼 직업 선수를 꿈꾸는 학생만 모아 놓은 운동부가 거의 없다. 대신 운동선수가 되려는 학생과 단순히 스포츠를 즐기려는 학생이 부카츠라는 공간에서 함께 땀을 흘린다. 우리로 치면 운동부와 동아리의 중간 형태다. 배구뿐 아니라 야구, 축구, 농구, 육상, 수영 등 주요 종목 유소년 선수들이 학교 부카츠에서 훈련하며 학업을 병행한다. 일본 문부과학성 산하 문화청에 따르면, 일본 중학생의 약 70%는 부카츠에서 활동하고 있다.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이 많은 만큼 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할 기회도 많다. 여자 배구만 따져도 2019년 기준 3,852개 고교팀에 학생 선수 5만7,103명이 등록됐다.

반면 한국에선 학생 선수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정 감독은 "운동부를 하려는 학생이 없다 보니 키가 큰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만 들리면 학부모를 찾아가 배구부 가입을 설득하고 있다"며 "6명이 뛰는 배구팀 하나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 감독은 "선수가 없어서 대회 때마다 일반 학생으로 채워 넣는 팀도 많다"고 전했다. 올해 7월 기준 한국 여자 고교 배구팀은 17곳에 불과하고, 등록 선수는 202명이다.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선수 부족으로 경기력 약화 악순환"

한국일보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이 지난해 7월 14일 대만 타이베이대학 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아배구연맹(AVC) 챌린지컵 준결승전에서 바레인의 공격을 차단하고 있다. 이날 한국은 바레인에 세트 스코어 0대 3으로 졌다. AVC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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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부족은 경기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정 감독은 "선수가 없다 보니 부상 위험이 있으면 실점하더라도 블로킹을 자제시키는 감독들도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 학교에서 배구팀 정원인 6명을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다치면 팀 전체가 경기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소극적 플레이로 일관하다 보니, 짜임새 있게 팀 전술을 연습해보거나 잠재력을 발견할 기회도 줄어들고 있다. 당장 경기에 뛸 선수가 없다 보니 대체로 신체 조건에 따라 포지션이 정해진다. 팀에서 가장 키가 큰 선수는 블로킹과 속공을 담당하는 센터, 발이 빠른 선수는 공을 올려주는 세터로 보낸다. 김 부회장은 "선수층이 두꺼우면 다양한 포지션 훈련을 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학생 시절 정해진 포지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잠재력을 찾아볼 기회도, 기본기와 전술을 익힐 기회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다 보니 실력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일본에선 선수층이 두껍다 보니 여러 포지션을 체험해보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위치를 찾아낸다. 기본기와 팀 전술, 세밀한 기술을 체득할 기회도 많다. 유소년 스포츠의 토대가 탄탄하다 보니 국제대회 성적도 기복이 없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인재를 키워낼 뿌리가 없어 '제2의 김연경'이 갑자기 등장하길 기원할 수밖에 없는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 스포츠가 '기우제 스포츠'로 불리는 이유다.

"탄탄한 생활체육 위에 엘리트 체육 육성"

한국일보

한국초등배구연맹이 2022년 7월 개최한 제1회 땅끝 해남기 전국초등학교 배구대회에서 초교 여자 배구팀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는 모습. 한국초등배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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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현장에선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되찾으려면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생활체육 저변을 넓혀 선수층을 두껍게 하는 게 우선 과제이자 장기 과제로 꼽혔다. 프로팀과 고교팀의 연계 강화,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교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정 감독은 "프로 구단들이 지역 고교팀 2~3곳과 연계해 훈련 지원과 멘토 수업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팀 연습에 고교 선수들이 함께 참여하면 경제적 비용도 줄일 수 있고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김연경 같은 선수와 함께 운동하는 것 자체가 큰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면서 "프로 선수들에게 기술이나 전술 코칭을 받는 것만큼 좋은 훈련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초등배구연맹은 유소년 배구대회 최초로 학교 운동부(엘리트 체육)와 스포츠클럽(생활체육)이 함께 참여하는 대회를 준비 중이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경계를 허물어 선수층을 넓히려는 시도다. 8월 열리는 '제3회 땅끝 해남기 전국초등학교 배구대회'에는 학교 운동부 35개 팀과 스포츠클럽 9개 팀이 참가한다. 김 부회장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생활체육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엘리트 팀으로 넘어와야 스포츠 경쟁력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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