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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기업 도울 ‘지원군’이 없다 [리부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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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EU는 이념 초월 자국 산업 지키는데
한국은 규제 만들어 사사건건 발목만


그야말로 글로벌 경쟁 시대다. 산업 패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은 자국 기업 힘 실어주기에 한창이다. 세금 감면과 인센티브 등 막대한 지원은 물론이고 필요에 따라 과세·규제 카드로 경쟁 기업 사업 확장을 막아선다. 반면 한국 기업은 외롭고 고독한 싸움 중이다. 정부 지원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국회는 자국 기업 발목 잡는 규제만 고민하는 모습이다. 특히 지난 4월 총선 이후 ‘여소야대’ 국회가 자리 잡으며 상황이 악화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K칩스법·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등 굵직한 법안은 표류 중이다. 오히려 반기업 정책 향연이 벌어진다. 원청 업체 책임 범위를 하도급 노동자까지 넓히는 노란봉투법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에 우려의 목소리를 던진다. 국회가 ‘규제 진앙지’로 머물면 안 된다는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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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는 6월 5일 첫 본회의를 열어 정식으로 개원했지만, 출발부터 ‘반쪽 국회’로 파행 운영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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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소리’ 나오는 韓 첨단 산업

“정당 초월한 美 사례 배워야”

한국 경제를 이끄는 건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이다. 하지만 주요국이 앞다퉈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서는 반면 한국 반도체 지원·육성 법안은 이제야 논의 단계다. 기존 법안도 여야 정쟁에 밀려 ‘일몰 연장’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반도체 기업 시설 투자 시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K칩스법)은 올해 말 일몰된다. K칩스법 아래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15%, 중소기업은 25% 세액공제를 받는다. 다만 연장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21대 국회에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이른바 K칩스법 연장안(2030년 일몰 연장)이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에 표류,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여야가 각각 연장안을 내놨지만 보조금 지급 등을 두고 입장이 갈린다. 여당과 달리 야당은 보조금 지급에 부정적인 분위기다.

첨단 산업 전력 수요 대응을 위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법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전력망확충위원회를 만들어 각 부처별 인허가를 하나로 통일해 처리하고 송전망이 지나는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중재도 정부가 직접 나서겠다는 게 골자다. 통과 시 핵심 기간망 건설 기간을 30% 단축하고 비용 효율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여야 정쟁에 밀려 법안은 1년째 표류 중이다.

국내 첨단 산업 지원법이 제자리걸음 하는 사이 주요국은 공격적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당과 이념을 초월해 법안을 만드는 모습이다. 최근 미국 의회는 반도체지원법(미국 칩스법) 수혜를 입은 기업이 중국 내 생산된 반도체 제조 장비를 구매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 발의는 마크 켈리 민주당 상원의원을 비롯해 마샤 블랙번 공화당 상원의원, 프랭크 루카스 하원의원 등이 함께했다. 마크 켈리 상원의원은 성명을 내고 “미국이 반도체 제조업을 부활시키는 상황에서 중국 등이 미 반도체 기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판세를 읽고 미국처럼 초당적 정책을 내놓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한다. 허문구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글로벌 시장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 중이고, 한국 기업도 한복판에 뛰어든 상태인데 정치권은 기업을 견제와 규제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도 “정치적 진영 논리가 경제 논리를 뒤덮는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없다”면서 “많은 기업이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나갈 만큼 상황이 안 좋다. 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

자본 시장 관계자들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황승택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각 국가가 세제 혜택과 연구개발 지원 등 공격적으로 자국 기업용 ‘판’을 만들고 있다. 한국 역시 정부와 국회 역할이 중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도 “미국 주도로 글로벌 밸류체인 재편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산업 정책 시대가 열렸다”면서 “정부와 국회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이해득실이 아닌 경제적 편익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 예산국처럼 ‘초당적 연구소’를 활용한 정치 중립적 의사 판단 창구 확보도 필요하다”는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 의견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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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팔로어 전략 탈피?

혁신 탄압…‘퍼스트 무버’ 불가능

한국 산업과 경제는 그간 ‘패스트 팔로어’ 전략에 의존했다. 후발 주자로 선두를 빠르게 추격해 수익을 창출했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 부재는 아쉬움이 남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퍼스트 무버 기업을 만들자’는 구호가 나왔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은 없는 상태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모순적 태도라고 설명한다. 규제로 혁신을 탄압하면서 퍼스트 무버 탄생을 바라는 건 “앞뒤가 안 맞다”는 지적이다.

김한진 전 KTB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유연성이 결여된 규제가 혁신을 막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한진 전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산업 곳곳에 유연성이 결여된 정책과 제도가 존재한다”면서 “특히 벤처기업 육성과 생태계 조성, 기술특례상장 등 발행 시장 제도 대부분이 투자자 보호에만 집착하고 있다. 만약 애플과 테슬라가 한국 기업이라면 상장 문턱은 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혁신을 이끌 스타트업 업계도 한목소리를 낸다. 과거 타다 사례 발생 4년이 지났지만 바뀐 게 없다는 비판이다. 타다는 기존 택시 업계 승차 거부와 불친절 등 소비자 불만 누적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치권을 등에 업은 택시 업계 저항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타다 금지법)’을 발의하며 타다를 공격했다. 이후 대법원이 타다를 운전사 포함 합법적 렌터카로 판단했지만, 기존 타다 서비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문제는 이후 상황이다. 타다의 몰락을 본 IT 업계는 모빌리티 분야에서 하나둘 발을 뗐다. 사실상 남은 건 카카오T 운영사 카카오모빌리티뿐이다. 이에 택시 플랫폼 시장점유율 90% 이상을 카카오T가 싹쓸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정부 규제가 ‘과점 시장’을 만든 셈이다. 정부는 뒤늦게 모빌리티 시장을 ‘독과점’으로 규정하고 각종 규제를 들이밀고 있다. IT 업계는 규제가 아니라 새로운 경쟁자를 뛰어들게 만들 ‘유인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토로한다.

타다 사태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기존 산업과 신산업이 부딪히는 현장이 도처에 널려 있다. ‘직방’ 등 프롭테크와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로톡’ 등 리걸테크와 대한변호사협회 갈등이 대표적이다. 한 벤처캐피털(VC)대표는 “누군가는 내수를 겨냥한 플랫폼이 무슨 혁신이냐고 말하지만, 모든 혁신의 시작은 내수 테스트다. 가능성을 발견하면 투자를 받고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다. 하지만 한국 스타트업은 첫 발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든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다만 정부는 여전히 플랫폼 규제 일변도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플랫폼 독과점 문제는 법제화를 통한 규율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한다. 이에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6월 19일 열린 ‘디지털 패권 경쟁 속 바람직한 플랫폼 정책은’ 토론회에서 “플랫폼 스타트업이 전멸하면 플랫폼 경제 발전도 더디고 경제 주체 이익도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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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금지법 통과 당시 ‘더 많은 타다’를 언급했던 국토교통부는 기존 택시 업계 보호에 주력하고 있다. (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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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티브 규제 탈피 목소리

‘포괄적 네거티브’ 전환 시점

규제 방식 전환을 외치는 주장도 나온다. 그간 한국 산업 규제는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을 취했다. 법에 사업 가능한 항목을 열거하고 이외 애매한 영역은 모두 금지하는 형태다. 포지티브 규제는 한국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던 1980~1990년대 효과적이었다. 한국 경제 규모가 크지 않고 정부 주도로 경제 성장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가가 모든 분야에 개입하는 게 사실상 어렵게 되면서 ‘네거티브(Negative)’ 규제 전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포지티브 규제와 반대로 안 되는 것만 빼놓고 다 허용하는 형태다.

전문가들은 네거티브 중에서도 ‘포괄적 네거티브’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규제 대상이더라도 신제품과 신기술의 경우 일단 지켜보고 필요하면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미국 정부가 크립토 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이에 부합한다. 미국 행정부는 크립토 시장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가상자산 다수는 증권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업계를 압박 중이다. 그럼에도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허용하며 산업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에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장했던 크립토 시장 역시 미국이 장악할 가능성이 커졌다.

오태동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의 포지티브 규제 방식은 새로운 산업 도입과 발전이 늦어지고, 관련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밀리게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산업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파견 분야를 예로 들며 네거티브 규제 전환을 강조했다. 국내 파견법은 특정 업종만 파견 근무를 가능하도록 규정한다. 파견이 가능한 업종에는 운전·경비·건물청소·컴퓨터전문직 등 32개 직종이 포함되는데, 제조업은 대상에서 빠져 있다. 제조업의 경우 직접 생산 공정에는 파견 근로자를 쓸 수 없으며, 2년 이상 근무 시 원소속과 관계없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 본질은 업무 비용 최소화다. 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택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현행 포지티브 규제 방식의 파견법은 사내도급을 불법파견으로 판결해 기업 경쟁력을 깎아내리고 있다. 하건형 이코노미스트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 선진국 수준의 정책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움 주신 분들(총 16명, 가나다순)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명예교수,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한진 전 KTB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오태동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이병화 신한투자증권 기업분석부장,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 허문구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 황승택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장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6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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