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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이주여성 노동은 어쩌다 ‘위험의 최전선’에 놓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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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참사 피해자 중 15명이 여성 이주노동자

불안정·저임금 일자리에 더해진 ‘위험의 고리’

경향신문

지난 6월 30일 경기 화성시 화성시청에 마련된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 추모분향소에서 추모객이 묵념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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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국제결혼, 저출생 대책, 다문화 가정, 돌봄·가사노동, 식당, 가정폭력으로부터의 보호. 그간 이주여성과 관련해 미디어에 주로 언급된 키워드다. 2020년 겨울 캄보디아 출신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이 사망하면서 비닐하우스와 같이 열악한 주거환경이 사회문제로 불거졌다. 그러나 노동 주체로서의 이주여성과 안전 문제가 전면적으로 조명된 적은 없다. 지난 6월 24일 경기 화성시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위험의 최전선에 있는 이주여성의 노동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참사 피해자 23명 중 15명이 여성 이주노동자(중국동포 14명·라오스 출신 1명)였다.

흔히 제조업 공장은 남성 이주노동자의 일터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공장엔 여성 이주노동자도 존재한다. 이번 피해자들은 배터리 검수와 포장 업무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동포이자 수년간 이주민 상담을 해온 박연희씨는 화성 참사 피해자 다수가 여성 중국동포라는 데 놀라고 안타까웠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 7월 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성 이주민들은 대체로 가사노동자, 간병인, 아이 돌봄, 요양보호사, 식당과 같은 서비스업종에서 많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제조업 공장에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며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위험에 노출돼 있는 문제가 이번 사고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이주노동자를 연구해온 한 연구자는 “여성 이주노동자는 서비스업에서 많이 일하기는 하지만 제조업에서도 상당 부분 일을 하고 있다”며 “외주화된 위험을 이주민들이 담당하는 현실을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명의 피해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한국에서 실제 일하고 있는 여성 이주노동자 규모는 정확히 모른다. 공식 통계가 없다. 통계청·법무부가 발표하는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에 의하면 2023년 5월 기준 경제활동인구에 해당하는 15세 이상 외국인 여성은 32만3000명이다. 산업별 취업자는 도소매·음식·숙박업 10만7000명, 광·제조업 8만1000명, 사업·공공서비스 7만7000명이다. 다만 이 수치에서 미등록 체류 상태의 여성 이주노동자 등은 빠져 있다.

학계에선 세계적으로 여성 이주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그렇게 이주한 여성들이 가사, 돌봄, 성적 서비스, 단순 노무 등 성별에 따라 분업화된 노동을 전담하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여성 이주노동자 지위가 남성보다 불안정하고 열악하다는 분석은 여럿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6년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의하면, 여성은 임시·일용근로자 비율이 48.2%로 남성(29.2%)보다 높았고, 상용근로자 비율은 45.7%로 남성(67.2%)보다 낮았다. 이번 화성 참사에서도 피해자 상당수는 용역업체를 통해 일용직 노동을 한 사례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자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분석에 의하면, 2021년 중국동포의 월 소득구간 중 300만원 이상 비율이 남성 34.6%, 여성 4.6%로 남성이 30%포인트 높았다. 100만~200만원 미만 비율은 남성 12.5%, 여성 32.2%로 여성이 19.7%포인트 높았다. 결혼, 임신, 출산 등 영향으로 여성 이주노동자가 안정적인 고임금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비정규직이자 저임금인 여성을 선호하는 업체들의 수요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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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 아리셀 참사 대책위원회와 유가족협의회 관계자들이 경기 화성시청 추모분향소 앞에서 시민추모제를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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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주노동자 산재현황조차 없는 게 한국 현실”


특히 한국에선 ‘이주+여성’의 고리가 위험과도 연결된다. 안산이주민센터의 박천응 목사는 “정규직은 회사에서 안전교육을 하지만 용역업체를 통해 일을 하러 가는 경우에는 용역업체와 모기업이 산업안전을 서로 떠넘기는 형태가 된다”며 “안전교육을 받을 기회가 상실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역의 한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 노동자 A씨는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한데 남자와 비교해서 ‘왜 이렇게 수량이 적으냐’며 똑같이 하라고 한다”면서도 안전교육과 관련해서는 “이거(자료) 읽어보라고 하고 그냥 본인이 알아서 한다”고 했다. A씨는 이번 참사에 대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마음이 아프다”고 했지만 당장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생산 설비부터 작업 도구까지 남성을 기본값으로 설계되는 제조업 공장에서 여성에 맞춰진 안전교육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이주연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은 여성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보상 신청률이 남성 이주노동자의 18% 수준에 불과한 점을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 산재가 남성에게만 벌어지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여성 이주노동자의 산재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재 보상 신청률이 낮은 이유로는 산재보험 자체에 가입돼 있지 않거나 가사노동자, 요양보호사 등 여성 이주노동자가 종사하는 직업군에서 노동자성 인정이 불확실한 점이 있다. 또 여성 이주노동자의 산재 보상 승인율이 남성보다 낮다. 여성 이주노동자 업무가 동일한 자세에서 장기간 반복하는 작업이 많아 근골격계 질환이 다수 발생하지만,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업무상 질병 승인율은 50~60% 수준에 불과하다.

이 연구위원은 지난 7월 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여성 이주노동자의 산재 현황에 대해 파악조차 되지 않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며 “이번 참사는 그런 문제가 비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라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늦었지만 정부가 지금이라도 이주노동자의 산재에 대해 현황 파악을 시작해야 하고, 이주노동자 산재를 남성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젠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주에 종속돼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기 힘들게 만드는 고용허가제 등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우삼열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소장은 “생산직 노동에 있어서 아무래도 남성들의 경험치가 높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노동현장에 진입할 때 위험에 대한 인지가 어려울 수 있다”며 “부당한 작업 지시나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에 대해 여성 노동자들이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사업주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쉬운 대상으로 보는 면이 있고, 더욱 건강과 작업 안전에 있어서 세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연희씨는 “현실적으로 가사노동자는 4대 보험 가입, 노동자 인정이 안 되는데도 정부는 필리핀 여성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느냐”며 “이런 상황에서 이번 참사를 계기로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깨닫고 대책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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