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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지역소멸시대에 ‘프레스턴 모델’…공동체에 집중하니 지역이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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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국 랭커셔주 프레스턴시 시장 내 메인홀에서 시민들이 춤을 추고 있다. 1800년대부터 이어져 온 프레스턴 마켓은 1875년에 설치된 빅토리아식 캐노피를 2018년 지역 업체와 함께 리모델링했다. 공공상업공간으로 재건된 이후 중요한 지역사회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레스턴 시의회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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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코끝이 찬 지난 2월. 서울 은평구와 강북구, 경기 광명시와 안성시, 전남 영암군 등 5개 지방자치단체장이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도시와 지역을 되살린 영국 프레스턴시의 사례를 보고 오기 위함이다. 저마다 인구 규모도 지역 형편도 다른 지자체장들이 무엇을 궁금해 한 것이었을까? 프레스턴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었을까?

영국 랭커셔주 프레스턴은 2022년 기준 인구 약 15만 명의 작은 도시다. 인구는 우리나라 광양시와 비슷하다. 영국 북부 중심도시 맨체스터에서 차로 약 1시간가량 거리에 있다. 산업혁명 이후 번성했지만, 영국 제조업이 무너진 1970년대 이후 기업이 떠나간 쇠락한 도시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높은 실업률은 물론 영국 내 자살률과 아동빈곤율이 가장 높던 곳 중 하나였다. 도시 내 양극화도 심해 부촌과 빈촌 거주자간 기대수명이 15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다.

프레스턴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 투자금을 끌어오려 했다. 1990년대부터 글로벌 개발회사들과 복합 쇼핑센터 등이 포함된 대규모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투자자들은 떠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보수당이 집권한 중앙정부는 돈줄을 바짝 죄는 긴축재정을 선언하고 프레스턴 시의회 보조금중 약 2천만 파운드(약 349억원)를 삭감했다. 줄어든 보조금과 함께 재개발 계획도 사라졌다. 도시에는 실망감과 좌절감만이 남았다.

프레스턴 시의회는 거대 자본이나 외부 투자에 기대지 않기로 방향을 바꿨다. 맨체스터에 위치한 진보적 경제 싱크탱크인 ‘지역경제전략센터(CLES)’와 함께 ‘지역공동체 부 구축’(Community Wealth Building, CWB) 방식을 검토하고 이를 프레스턴에 적용하기로 했다. 기존 자본을 활용해 지역의 부(wealth)를 민주적으로 축적하는 방식이다. 지역순환경제의 한 방법론으로 2004년 미국 비영리기관인 ‘협의하는 민주주의’에서 개념을 정립했다.

■공공 조달을 지역 안에서

먼저 2013년 프레스턴 시의회가 주축이 되어 지역의 대학과 공공기관 등을 설득해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들은 선박의 ‘닻’처럼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앵커 기관’이라 불린다. 앵커 기관들은 수천 개의 일자리를 갖고 매년 엄청난 규모의 구매(조달)를 하기에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는다. 프레스턴 시의회와 지역경제전략센터는 앵커 기관의 자금과 영향력이 역외로 유출되지 않고 도시 안에서 순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실제 2012~13년 사이의 프레스턴시 앵커 기관들의 구매는 무려 7억5천만 파운드(약 1조3231억원) 규모였지만 고작 5%인 약 3천8백만 파운드(665억원)만 프레스턴시 안에 머물고 나머지는 외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역순환조달’로 명명된 전략 아래 협의체는 프레스턴에 있는 경제 주체들이 앵커 기관 조달 계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칙과 관행을 손봤다. 중소업체들이 참여하기 쉽도록 조달 관련 서류와 절차를 손보고, 계약 업무 범위를 쪼개 더 다양한 업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이를 통해 프레스턴의 중소기업들이 앵커 기관과 신규 체결한 계약은 학교 급식과 법률 서비스, 대규모 건설공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역순환조달 전략 시행 이후에는 2016~17년 같은 앵커 기관의 구매 금액 6억2천만파운드(1조937억원) 중 19%인 1억1천만 파운드가 프레스턴 안에서 지출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생활임금과 좋은 일자리

프레스턴 시의회는 공정한 고용과 생활임금에 집중했다. 시민들이 좋은 일자리를 가져야 안정된 소득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은 지역 경제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시의회는 2012년 전 직원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해 영국 북부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공신력 있는 비영리기관 ‘생활임금재단’ 공인을 받은 생활임금 고용주가 되었다. 이후 시의회는 프레스턴시 안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 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이를 공인받을 수 있도록 권유했다. 2023년 7월 현재 프레스턴 소재 30개 기업이 생활임금 지급을 공인받았고, 약 4천 명의 근로자가 실질 생활임금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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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영국 랭커셔주 프레스턴 시내 중심가 대규모 복합상업시설 건설 기공식 모습. 프레스턴 시의회가 공공기금을 지원받아 주관하고 프레스턴 소재 에릭라이트건설이 공사를 진행한다. 개발 및 건설 단계에서 최대 200개의 정규직 건설 일자리를 기대하고 있으며, 에릭라이트건설은 사회 책임 프로그램을 통해 공급망과 지역사회에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예정이다. 에릭라이트건설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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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프레스턴 시의회 및 앵커 기관들은 조달 계약의 조건으로 모든 계약 업체 직원들이 공정한 고용조건을 갖췄는지를 확인했다. 직원과 고객이 연령과 성별, 인종과 종교 등으로 차별받지 않는지, 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있는지, 비용 절감만을 위해 무리한 인력 배치를 하지는 않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공공 조달을 매개로 공동체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사회적 효익까지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사회적 가치 추구

일례로 앵커 기관 중 하나인 랭커셔 경찰은 공급업체 모니터링 조항에 프로젝트 지출의 31%가 현장에서부터 10마일(반경 16킬로미터) 이내에 이뤄지는지 여부와 건설의 경우 75%가 중소기업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점검한다. 이러한 노력은 점차 확대되어 지난해 프레스턴 시의회가 승인한 ‘사회적 가치 조달 프레임워크’로 공식화되었다. 이 평가틀은 공공 조달을 통해 지역사회의 사회적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법들이 담겨있다. 해당 프레임워크는 7만5천파운드(약 1억3천만원)이상의 모든 계약에 사용된다. 공급업체는 지역 경제와 공정한 고용을 위해 노력하고 기후 위기 대처, 미래 인력에 대한 투자 및 지역사회 공헌 등 5개 영역에 대한 활동을 설명해야 한다. 계약을 체결하면 공급업체는 해당 프레임워크에 따라 활동 내용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하며, 계약 과정에서 해당 부분을 확인받을 수 있다.

프레스턴의 성과는 객관적 지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프레스턴시 노동가능인구 취업률은 2023년 80.4%로 영국 북부에서 가장 높다. 그만큼 일자리가 많다는 뜻이다. 이는 2013년 71.4%, 2014년 65.5%에 비해서도 오른 수치다. 실업률은 2023년 기준 4%로 영국 북부의 맨체스터 5.1%, 리버풀 7.0%에 비해 낮고, 2014년의 6.5%에 비해서도 내려갔다. 프레스턴시 통계에 따르면 상대적 아동빈곤율도 2017~18년 36%에서 2020~21년 32.6%(영국 전체는 약 30%)로 감소했다.

하지만 진정한 프레스턴의 성과는 수치를 뛰어넘는다. 여러 개의 노동자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시의회는 사회주택 개조를 위해 지역 사회단체와 협력해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공급망을 통해 지역에서 자산이 순환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방식의 사회·경제조직들이 생겨났다. 금융 소외계층과 영세 사업자를 위해 지역 은행도 탄생했다. 프레스턴 시의회는 인근 리버풀 시의회 등과 힘을 합쳐 상호금융조합 ‘노스웨스트 뮤추얼’을 설립해 2020년 영국 금융감독청(FCA) 승인을 받았다. 협동조합 은행을 통해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취약 계층과 영세업체에 신뢰 기반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지역 불평등을 해소하고 금융 지역 자산을 축적·발전시키고자 함이다.

프레스턴의 성과는 공동체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얻은 결실이다. 이전의 미국 클리블랜드와 스페인 몬드라곤 모델과 같이 공동체의 힘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기도 하다. 올 2월 지방자치단체장들과 함께 프레스턴시를 방문했던 김영식 전국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사무국장은 “행정의 합리성과 촘촘함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지역 공동체 부를 구축하는 전략과 그를 실행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도 일회성으로 생각하고 접근하지 않았다. 계속 다듬고 수정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프레스턴 모델의 힘이라고 본다”라며 프레스턴 시도가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의 경우 조달 관행과 지자체별 특성을 면밀히 살펴 적용해야 할 것”이라며 프레스턴 모델이 목적하는 바를 잘 이해한 다음 현지화할 것을 조언했다. 덧붙여 양 교수는 “프레스턴 모델에서처럼 공공 앵커 기관 역할은 중요하다. 한발 더 나아가 일반 대기업들도 지역순환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와 행정부가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변동팀장 ey.y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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