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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이스라엘, 또 도시 전체 소개령···“차라리 집에서 죽겠다” 피란 포기하는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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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도시 가자시티 전체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피령을 내린 10일(현지시간) 주민들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리를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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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이 최근 강도 높은 공격을 퍼붓고 있는 가자지구 최대 도시 가자시티 전체에 결국 소개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대탈출’ 행렬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 9개월간 반복된 토끼몰이식 대피령과 이어진 공격에 지친 주민들은 “차라리 집에서 죽겠다”며 피란을 포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0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은 가자시티 전체 주민들을 대상으로 남쪽으로 전원 대피할 것을 명령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전단엔 지정된 두 개의 ‘안전한 경로’를 따라 중부 데이르알발라로 떠나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스라엘군이 최근 가자시티 일대에서 지상전을 재개하며 일부 지역에 대피령을 내린 적은 있지만, 가자시티 전체를 대상으로 소개령을 내린 것은 지난해 10월 전쟁 발발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이스라엘군은 전쟁 발발 일주일째인 지난해 10월13일 가자시티 등 북부 주민 110만명에게 ‘24시간 이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며 첫 소개령을 내린 바 있다.

연이은 폭격과 교전으로 잿더미가 된 가자지구 북부에는 주민 약 30만명이 남아 있으며, 이 가운데 대다수가 한때 가자지구 최대 도시였던 가자시티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초반 이스라엘군이 북부 지역을 집중 공격하며 주민 대다수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으나, 북부·중부에 이어 남부 최대 도시 칸유니스와 최남단 도시 라파까지 연이어 공격받자 목숨을 걸고 집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잿더미’ 된 가자시티…구조대도 접근 못 해 거리엔 시신 방치


가자시티에는 최근 이어진 폭격으로 병원이 폐쇄되고 구조대 접근까지 제한되며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곳곳에 방치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자지구 민방위대 대변인인 마흐무드 바살은 “거리 곳곳에 시신들이 흩어져 있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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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한 팔레스타인인 남성이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한 병원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아이를 안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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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폭발 참사로 500명 가까이 숨진 알아흘리 병원은 이스라엘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결국 문을 닫았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 다른 병원으로 대피해 병원이 텅 빈 상황에서, 이 사실을 모른 채 부상을 입은 주민들이 목숨 걸고 병원에 찾아왔다가 되돌아가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반복된 대규모 대피령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미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여러 차례 집을 떠나 피란민이 됐다”면서 “(대피령은) 이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베첼렘 역시 자국군의 대피 명령이 “완전한 광기”라고 질타하며 “국제사회가 개입해 이스라엘이 전쟁을 즉각 중단할 것을 압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스라엘군 ‘안전지대’ 공격 계속…대피령 당일 피란처 공격


‘대피령’이란 말이 현재 상황을 반영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스라엘군이 이른바 ‘안전지대’로 설정해 주민들에게 이주를 명령한 지역을 반복적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은 이날 가자시티 주민들에게 중부 데이르알발라로 떠나라고 명령했으나, 이날 오전에도 데이르알발라와 인근 누세이라트 난민촌 내 주택 4채를 폭격해 2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 6명은 어린이, 3명은 여성이었다.

유엔 인권사무소는 “이스라엘군이 군사작전이 진행 중인 지역으로 주민들에게 대피를 명령한 것은 큰 충격”이라며 “주민들이 안전하게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고 질타했다. 가자지구 내무부도 안전한 피란처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시 전체에 대피령을 내리는 것은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심리전’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이스라엘군은 지난달 ‘안전지대’로 설정한 데이르알발라와 인근 누세이라트 난민촌에서 자국 인질 4명을 구하는 작전을 벌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난민촌에 공습을 퍼부어 피란민 274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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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에 위치한 알아크사병원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아들의 시신을 안고 울고 있다. 데이르알발라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 주민들에게 대피를 명령한 ‘안전지대’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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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후 9개월간 이스라엘군은 하마스를 뿌리 뽑겠다며 비좁은 가자지구 안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토끼몰이식 소개령·대피령을 반복해왔다.

지상 최대의 ‘지붕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지구는 강화도 크기와 비슷한 약 365㎢ 면적에 230만명가량이 살고 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 밀집 지역이다. 가뜩이나 비좁은 땅에서 주민들은 더욱 비좁은 ‘피란처’로 내몰려 왔고, 이 피란처마저 연이어 공격받으면 다른 곳으로 재차 떠밀리는 일이 지난 9개월간 반복됐다. 가자시티에서 또다시 피란길에 오른 한 주민은 “이번이 다섯 번째 대피”라고 AP통신에 말했다.

피란민들이 대거 몰린 난민촌엔 주거시설은 물론 깨끗한 식수와 위생시설 역시 부족하고, 수백여명이 화장실 한 개를 사용할 만큼 보건위생도 악화돼 전문가들은 전염병 확산을 경고해 왔다.

파괴된 도시에 머물던 주민들 상당수가 다시 길을 떠나고 있지만, 일부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다. AP통신은 “이전과 같은 대규모 대피 행렬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계속되는 전쟁으로 많은 주민들이 가자지구엔 ‘안전지대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47세 주민 아브라힘 알바르는 “이스라엘 미사일은 남쪽과 북쪽을 구별하지 않는다”면서 “죽음이 우리 가족의 운명이라면, 집에서 존엄하게 죽을 것”이라고 BBC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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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현지시간) 폐허가 된 가자시티 거리를 주민들이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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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많은 주민들이 부상을 입은 데다, 이스라엘군 설명과 달리 안전한 대피로가 확보되지 않으면서 탈출을 포기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팔레스타인 적신월사는 폭격이 계속돼 집 밖으로 나설 수 없는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전했다.

일부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군이 제시한 이동 경로인 살라 알딘 도로를 통해 남쪽으로 가려면 이스라엘 군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AP통신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거나 굴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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