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04 (수)

"고래와 흑인은 친족이다"...차별로 질식할 듯한 세계에서 숨 쉬는 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책과 세상]
알렉시스 폴린 검스 '떠오르는 숨'
고래-흑인 노예-우리까지 연결된 '숨'
고래에게 배우는 익사하지 않는 법
한국일보

혹등고래 한 마리가 지난 14일 파나마 이구아나섬 인근 해역에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인 알렉시스 폴린 검스의 책 '떠오르는 숨'은 눈부시게 독창적이다. 인간이 바다에서 포획하는 '고래의 숨'과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 희생자인 '흑인의 숨'을 연결 짓는다. 인간과 고래가 학살당하는 존재이자, 학살 이후에도 살아남은 존재이자 같은 포유류라는 점에서다.

고래와 흑인 노예의 숨은 다시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로 점철된 자본주의가 목을 조르는 상황"에 속한 우리의 호흡으로 이어진다. 흑인 노예의 후손인 검스는 고래를 '해양 친족'이라 부른다. 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숨 쉬기 위해 '해양 포유류 견습생'이 되기를 자처한다. 차별과 혐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낯선 세계, 낯선 이야기…" 1인 출판사의 첫 책


'떠오르는 숨'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검스의 책이다. 시인이자 독립연구자인 검스는 이 책으로 2022년 미국 와이팅재단 논픽션 부문상을 받았다. 작가, 비평가, 편집자 등 100명의 추천·심사를 거쳐 매년 뛰어난 신진작가 10명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다.

'떠오르는 숨'을 찾아낸 건 1인 출판사 접촉면의 김보영 대표.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2019)' 등을 쓰고 '턴어웨이: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자들(2021)'을 번역한 김 대표는 지난해 6월 "좋은 걸 만들면 알아봐 줄 거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출판사를 차렸다. 이 책은 접촉면의 첫 번째 책이다. 김 대표가 번역했다. 책을 통해 낯선 세계, 낯선 이야기와의 접촉을 추구하겠다는 접촉면의 의지를 담았다.

원제는 'Undrowned'다. 직역하면 '익사하지 않은/는'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에 트라우마가 된 '익사'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고래 되기 연습'이 될 뻔했던 제목은 "우리의 호흡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다"는 검스의 제안에 따라 '떠오르는 숨'이 됐다.
한국일보

떠오르는 숨·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김보영 옮김·접촉면 발행·240쪽·1만7,000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백인 남성' 지우고 '흑인 여성'이 새로 썼다


검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해양 포유류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해양 포유류의 '생존'을 탐구하면서다. 해양 생물학자가 아닌 만큼 이들 존재의 경이로움에 집중했다. 해양 포유류를 다룬 대표적 안내서 '국립 오듀본협회 세계 해양 포유류 가이드', '스미스소니언 핸드북: 고래와 돌고래'를 읽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명상하듯 짧은 글을 써올렸다.

검스는 2021년 미국 심리학 전문 매체 사이콜로지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안내서 속 설명은 흑인 공동체가 직면하는 모든 형태의 감시와 폭력을 떠올리게 했다"며 "처음에는 개인적 이유로 해양 포유류에 끌린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것이 정치적이며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인 내 평생의 작업과 전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의 글은 폭발적 반응을 불렀고, 대안적 담론을 제시하는 독립출판사 AK프레스가 '창발적 전략'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 엮어 냈다.

'떠오르는 숨'은 유난히 일러둘 게 많은 책이다. 책은 '일러두기'를 통해 "일반적으로 해양 포유류에는 이들을 착취한 최초 발견자나 사냥꾼의 이름이 붙어 있다"며 "저자는 식민주의적 이름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 각 개체의 서식지나 특징을 부각하는 이름이나 학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린다. 동물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가 이끄는 북극 탐험대가 1741년 베링해에서 처음 발견한 '스텔러 바다 소(Steller's sea cow)'를 학명인 '하이드로다말리스 기가스'로 쓰는 식이다.

검스는 고래를 암컷, 수컷이라 지칭하는 대신 '여성', '남성' 또는 '그녀', '그'로 부른다. 인간에 의한 자의적 구분임을 밝히기 위해 '지정성별여성', '지정성별남성'이라고도 표현했다. 책을 편집한 김깃은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보고 발견하고 생각하건 간에 그 주체는 공공연히 '백인 남성'인 이 세계에서 고유한 '흑인성'을 노래하는 검스는 고래의 이름을 새롭게 쓴다. 그렇게 해야 하니까. 그래야 자유로워지니까."

'익사하지 않기'… 해양 포유류에게 배우는 생존법

한국일보

'떠오르는 숨'을 쓴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알렉시스 폴린 검스. 접촉면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검스는 "익사하지 않기에 일가견이 있는" 해양 포유류와 흑인이 어떻게 살해당하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주목한다. 2016년 8월 미국심리학회 학술대회에서 보고된 '수족관에 포획된 고래의 출산 기록'과 1970년대 '투옥된 흑인 인권 운동가의 출산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서다. 1981년 마지막 한 마리가 발견된 후 사라진 돌고래 클리메네의 이동궤적에는 노예 무역의 항로를 포개놓는다.

검스는 멸종 위기에서 다시 살아난 인더스강돌고래 등에게서 인간이 겸허히 배울 것을 촉구한다. "노예제, 포획, 분리, 지배의 전철을 밟으며 숨 쉴 수 없는 대기를 계속 만들어 가는 대신, 다른 호흡법을 연습하기 위한 가능성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책은 짧고 밀도 있는 20개 장으로 구성됐다. 협력하기, 존재하기, 깊이 들어가기 등 해양 포유류의 생존 지혜가 19개 장에 담겨 있고, 마지막 장은 이를 활용한 인간의 활동지침이다. 시적이면서도 유머가 가미된 각 장을 음미하듯 따로 떼어 읽어도 좋다. 거의 모든 글은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끝맺는다. "제국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흑인으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주어서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포유류답게 만드는지 결코 알지 못할 거예요."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