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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 (토)

[이은혜의 마음 읽기] 말이 어루만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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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부드럽다. 우선 연배가 높은 어른들의 목소리는 달콤해 상대와 내 전화기 사이에 꿀벌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근래 나는 한 달 정도 지치고 힘들었는데, 그때 이 어른들의 눈을 마주하자 저절로 눈가에 물이 맺혔다. 눈물은 아무 앞에서나 흐르지 않는다. 그가 먼저 눈길로 나를 어루만져야만 그제야 안전하다고 느껴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분들은 만나면 손부터 잡는데, 점점 얇아지는 피부 가죽 아래에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다. 직선으로 내달리는 말은 상대에게서 튕겨져 나오므로 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은데, 이분들의 빙 둘러가는 말 속에는 행여 낱말이 마음을 왜곡할까 봐 조심하는 성정이 어른거린다.



말은 그 자체로 현실 만들어내

미래 터주고 기억의 도구 돼

타인과의 경계 없애는 역할도

중앙일보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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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은 천성일까, 아니면 세월이 주는 걸까? 만약 세월이라면 고운 그것은 말과 몸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다섯 명이 모였다. 눅눅한 날씨에 꺼내놓은 과자는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어머나 눅눅한 과자도 맛있다.” 한 일행의 이 말에 나는 실제보다 말이 만들어내는 ‘현실’로 인해 과자를 즐길 수 있었다. 제주에서 렌터카를 빌려 여행하던 중 주차하다가 그만 차를 긁은 적이 있다. 이때 한 사람이 “두고두고 이야기할 추억거리다”라고 했다. 말은 미래를 터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상념이 작용하는 과거 기억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차를 반납하면서 시간이 늦어져 비행기를 겨우 잡아탔던 우리에게 그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됐다. 한번은 공동의 물건을 잘못 샀던 내게 팀원이었던 어른들은 “잘 샀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해주셨다.

이것들은 모두 상황과 행동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행동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데, 사실 존재를 먼저 본다면 나머지 요소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외부 환경, 인간이기 때문에 곧잘 범하는 실수는 때로 지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무실에도 부드러움이 공기를 타고 흘러다닌다. 화기애애함은 별칭을 불러주는 데서 생긴다. 한 직원의 자리는 소음이 나는 프린터 옆이다. 다들 그 직원이 몹시 신경 쓰인다. 내 자리가 저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출력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 직원을 ‘프린터 요정’이라 부르면서 사과 인사를 미리 전하곤 했다.

내 남편은 아플 때면 “미안”이라고 말한다. 아픈 것은 누구한테 미안할 일이 아니지만, 병자의 마음은 수축되어 견고한 일상을 어긋 내는 자신을 탓하면서 주변 사람의 안위를 더 염려한다. 앓는 사람은 나약한 자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세상에서 한발 비켜난 시간과 다투면서도 언어를 사유화(私有化)하지 않는다.

내가 만나는 출판인들은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흉흉한 시절이면 “그래도 우리가 모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며 서로 격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날들을 공유하면서 나중에 기억이 쉽게 마음속에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말을 매만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뭘까. 시스템과 법칙이 있고, 힘과 돈, 지식이 있다. 이것들이 주류인 세계는 경계 구획이 선명하고, 잣대는 칼 같다. 내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수행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언어를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 인식은 정확해야 세상과 자기 자신, 타인을 꿰뚫어 볼 수 있는데 그 정확성은 아마 ‘판단’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잠재 가능성’에 대한 인식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중 인물 마르셀은 고아 출신인 데다 사회적 계급이 낮은 여성을 배필감으로 데려와 한집에서 동거하는데, 마르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못마땅하지만 자기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마르셀의 외할머니(즉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죽은 이의 살아생전 언어 습관을 체현해 그녀가 쓰던 말투, 문투, 부드러움을 자기 것처럼 퍼뜨린다. 윗세대로부터 습득한 것 중에는 전 시대 문학의 서간체도 있다. 이처럼 타인의 언어를 빌려오는 것, 세 층위의 시대를 아울러 자기 문장의 리듬을 갖추고 언어를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는 것은 후세대의 마음을 미리 쓰다듬어주는 행위다.

시인 김혜순 역시 어머니나 외할머니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받아내 자신이 ‘엄마의 무덤’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죽음을 아름답고 윤리적인 계기로 삼아 시어들을 지었다. 타인을 자기 몸처럼 받아들이는 일, 그와 나의 경계를 없애면서 새로운 언어와 몸의 운율을 만들어내는 일은 과거를 끌어와 현재화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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