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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우리 삶의 빈곤과 불평등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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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 성공 내러티브 개발 발전 논리

과거 제국주의 불평등 알리바이 제공

세계 인구 60% 이상이 빈곤으로 허덕

저자 빈곤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꼽아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는 논리에 반기

‘역사’ 프리즘으로 불편했던 민낯 해부

격차/ 제이슨 히켈/ 김승진 옮김/ 3만원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과학 진보와 산업 발전의 혜택이 저개발 지역의 성장과 향상에 쓰일 수 있도록 새롭게 대담한 프로그램에 착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화, 풍요,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전 세계의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9년 1월20일 미국 전역으로 방송된 취임 연설에서 유엔과 마셜 플랜에 대한 지지와 함께 개발도상국 등을 겨냥한 글로벌 경제의 개발 및 발전 논리를 설파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해온 언론은 환호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논리는 머지않아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많은 식민지를 잃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받아들여졌고, 이들 역시 식민지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논리로 설파하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성공 내러티브인 개발 발전의 논리는 이들의 과거 제국주의적 행태나 이로 인해 가속화된 불평등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앞으로 움직일 방향성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세계일보

세계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통설과 달리 글로벌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며 이를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논증한 책이 나왔다. 사진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초상(왼쪽),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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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같은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세계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0%가 넘는 약 43억명이 인간의 역량이 훼손될 정도의 빈곤 속에서 불안정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1981년에 비해 ‘빈곤 인구’는 10억명이 늘어났다. 하루 생활비 10달러를 기준으로 할 경우 ‘빈곤 인구’는 51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80%를 달한다.

불평등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가장 부유한 나라의 1인당 소득은 가장 가난한 나라 1인당 소득의 32배였는데, 2000년에 들어 이 비율은 134배로 더 확대됐다. 개인 수준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했다. 2017년 옥스팜 발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부는 하위 인구 절반인 38억명이 소유한 부를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500년대에는 유럽과 나머지 지역들 사이에 소득과 생활수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여러 측면에서 중국과 인도,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유럽인보다 더 잘 살았다. 예를 들면, 1800년에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대수명이 각각 32~34세, 28~30세인 반면, 중국과 일본의 기대수명은 각각 35~40세, 41~45세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몇 세기 만에 이들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세계의 빈곤과 극단적 불평등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한쪽은 떠오르고 한쪽은 가라앉게 되었을까. 왜 빈곤과 불평등은 왜 계속해서 악화되었을까.

유엔 ‘인간개발보고서’ 통계자문위원과 유럽 그린뉴딜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경제인류학자인 저자는 책 ‘격차’에서 지구적인 빈곤과 불평등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겨우 500년 전에 서구 유럽에서 생겨나서 세계를 지배 중인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가 일으킨 결과라고 주장한다.

세계일보

제이슨 히켈/ 김승진 옮김/ 3만원


저자는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좋은 소식 내러티브’ 이면에 감추어진 더 큰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라는 프리즘을 가져다가 빈곤과 불평등, 기후 위기의 기원 속에 은밀하게 작동해온 자본주의 체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책에 따르면, 자본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사회적 진보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극대화하고 축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한계 안에서 자본 축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신을 더 팽창하기 위해서 ‘외부’를 필요로 한다.

15세기, 서구 열강들은 자원과 노동력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피해를 외부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들은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머지않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 글로벌 남부의 상당 지역을 차지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금과 은을 비롯해 수많은 자원을 추출하고, 아프리카 지역에선 많은 흑인을 노예로 만들어 신대륙에 투입했다. 나중에는 신대륙에서 생산한 설탕과 목화, 식민화된 인도에서 나온 곡물, 식민화된 아프리카에서 나온 자원이 유럽의 경제를 떠받쳤다. 자본주의가 불평등한 ‘세계 체제’를 형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반구에 남긴 영향을 파괴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행된 약탈과 폭력으로 7000만명의 원주민이 숨졌다. 인도에선 영국 식민지 시절에 기근으로 3000만명이 숨졌다. 식민주의 시기 이전에 영국과 비슷했던 인도와 중국의 평균 생활 수준은 곤두박질쳤다. 인도와 중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5%에서 10%로 급감했다.

세계일보

사진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왼쪽), 학대받는 흑인 노예를 그린 그림, 인도의 빈민.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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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고 20세기 중반이 되자 남반구 국가들은 독립을 이루고 자신들의 경제정책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이에 원조와 차관, 쿠데타 등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경제정책을 되돌렸다. 한국이나 필리핀, 그리스 등 안보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원조와 차관 정책을 실시했고, 이란과 브라질,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가나, 콩고 등 자원이 중요했던 나라들은 쿠데타와 강제력을 동원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차관과 빚을 빌미로 긴축, 민영화,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가동해 개도국의 경제와 산업을 선진국의 입맛에 맞게 재조정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을 이용해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성과를 훼손하고 서구가 그곳의 자원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구축해 나갔다.

저자는 그러면서 빈곤과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경제모델, 시스템을 채택해야 한다며 몇 가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다. 채무국에 대한 부채 탕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의 민주화, 노동력을 찾아 전 세계를 훑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글로벌 최저 임금제 도입,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주는 보편 기본소득 도입,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기후 행동 가속화 등등.

저자는 토마 상카라의 말을 인용해 글로벌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선 더욱 과감하게 상상하고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광기는 순응하지 않을 용기, 옛 공식에 등을 돌릴 용기, 미래를 발명할 용기에서 나옵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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