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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관객을 가지고 노는 90세 명인의 무대…국극 '조 도깨비 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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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에 폭소, 노래엔 어깨가 들썩…기립박수 끌어낸 조영숙

연합뉴스

국극 '조 도깨비 영숙'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아이고 눈으로는 못 보겄네 / 아이고 두 눈으로 못 보겄네 / 꽃송이가 한 송인가 나비가 한 쌍인가∼"

여성국극의 '산 증인' 조영숙(90) 명인이 노래를 부르자 관객들이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힘껏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객석 이곳저곳에선 "얼쑤!", "잘한다" 같은 우렁찬 추임새가 나왔다. 조 명인은 뜨거운 환호에 신명이 난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굽은 등허리로 덩실덩실 춤을 췄다.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 '조 도깨비 영숙'은 73년간 국극 외길 인생을 걸어온 조 명인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창이면 창,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 어느 하나 모자랄 것 없이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며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조 도깨비 영숙'은 밴드 이날치의 베이시스트 장영규와 정가 가수 박민희가 국극 '선화공주'를 현대적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제목에 '도깨비'가 들어간 이유는 과거 조 명인의 별명이 도깨비였기 때문이다. 도깨비처럼 무엇이든 기막히게 잘한다는 의미로 동료들이 붙여줬다고 한다.

조 명인은 이 작품에서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 석품, 철쇠, 왕 등 5명의 배역을 맡으며 별명 값을 톡톡히 했다. 주로 남자 역할을 맡아온 그가 여성 캐릭터인 선화공주를 소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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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 '조 도깨비 영숙'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2장은 미리 녹화한 영상을 4개의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고, 3∼4장은 영상과 라이브 무대를 결합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조 명인은 1장에서 모든 역할을 홀로 소화한다. 한 스크린에서 왕을 연기하는 조 명인의 대사가 끝나면 다른 스크린에서 선화를 연기하는 조 명인이 등장한다.

캐릭터에 따라 말투와 표정, 노래 방식이 달라지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엄한 군주에서 순애보를 간직한 청년, 그를 위로하는 얌전한 공주, 공주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은 신하를 자연스레 오간다.

하이라이트는 조 명인이 실제로 무대에 서서 제자 박수빈, 변민지, 한혜선, 황지영과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4장이다.

조 명인이 스태프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올 때부터 관객들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고정했다. 낚싯바늘처럼 휘어진 허리와 힘겨운 걸음걸이를 보며 그가 무대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하던 찰나, 조 명인의 우렁한 창이 시작됐다.

"내 팔자 개를 주랴 / 개만 못한 내 팔자야 / 친구 하나 잘못 만나 경만 치고 혼만 났네 / 그래도 못 잊을 건 친구 밖에 또 있느냐…"

무대가 떠나갈 듯한 목청에 객석에서는 '우와' 하는 감탄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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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 '조 도깨비 영숙'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가 4장에서 맡은 역할은 서동의 친구인 철쇠. 조 명인의 특기인 코믹 캐릭터로, 쉴 새 없이 유머러스한 대사를 던진다.

조 명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즉석에서 만들어낸 애드리브를 몰아쳤다. 여기서 반드시 웃음이 터질 것이라는 자신감과 그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 없이는 시도하기 어려운 대사들이다.

그의 예상대로 관객들은 조 명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배꼽이 빠질 것처럼 웃었다. 멀찍이서 서동과 선화를 바라보며 흠칫 놀라는 모습에도 홀린 듯이 폭소가 나왔다.

극이 끝날 무렵 그가 배우들과 나란히 서 '서동요'를 부를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허리를 세우고 객석을 바라보는 조 명인의 눈빛이 묵직한 감동을 선사했다.

공연을 마친 조 명인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건네자 관객들은 대극장에서나 들을 법한 큰 소리의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하나둘 일어섰다.

쇠락의 길로 접어든 우리의 전통 국극을 묵묵히 지켜온 예인이자 구순의 나이에도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어른을 위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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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 '조 도깨비 영숙'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박수가 멈추지 않아 조 명인은 한참이나 기다린 후에야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가 떨렸고, 제자들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여우비가 내리고 무더운 날씨에도 찾아준 관객들께 감사드린다"고 입을 뗀 그는 "국극이 절대 사라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그가 퇴장한 후에도 환호와 박수가 이어지자 조 명인은 다시 무대에 올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만 젊었으면 좋았을 걸…이제 나 들어가야 해요"라고 말해 객석을 또 한 번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공연은 27일 한 차례 더 이어지며, 원캐스트로 진행된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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