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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꿉꿉한 장마철, 향을 담아내자 산뜻함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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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경희 작가가 지난해 12월 개인전에서 선보인 수련 향로. 박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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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흠뻑 젖은 습기 가득한 장마의 나날을 견딜 수 있는 즐거움 한 가지는 향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내키는 향을 골라 성냥을 켜서 얇은 선향을 피운 뒤 한동안 멍하게 서 있는 게 하루 시작이자 첫 낙이다. 향을 고른다고는 했지만 가진 것은 모두 숲을 느낄 수 있는 백단향이다. 영어로 샌달우드(Sandalwood), 프랑스어로는 상탈(Santal)로 불린다. 프랑스 유명 향수 브랜드에서 제품을 내놓을 정도로 백단향은 오랜 시간 사랑받았다.



이 향에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은 4년 전 여름부터였다. 이야기와는 별개로 문장에서 향이 전해졌다. 작품의 배경인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숲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향의 향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묵직한 나무 냄새, 바람에 실려 오는 호수 냄새, 풋풋한 풀 냄새와 이끼가 덮인 진한 흙냄새까지. 온갖 숲속 향을 머금은 글을 읽다가 문득 오래전에 사둔 백단향 선향을 피우고 싶어졌고 그 뒤로 여름, 특히 꿉꿉한 장마철에 감각의 즐거움을 높이는 작지만 확실한 방법이 되었다.







예사롭지 않았던 전통 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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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요의 백자사자향로(오른쪽 위)와 오유글라스워크의 유리 향꽂이(왼쪽). 박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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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위한 도구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작은 꽂이부터 소사요의 백자사자향로와 오유글라스워크의 유리향꽂이 등, 향을 담는 그릇이라 여기고 여러 개를 모았다. 나무, 금속, 돌과 유리 등 다양한 소재로 공예가들이 만든 아름다운 향꽂이가 많아서 물욕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다. 특히 우리나라의 향로는 예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정교하고 유려한 새김과 조형으로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백제 금동대향로를 비롯해 구슬 위에 한 발을 올려 의젓하면서도 강아지처럼 귀여운 모습의 사자 조각의 청자 사각형뚜껑 향로, 섬세한 연꽃을 앙증맞은 토끼 네 마리가 받치고 있는 청자 투각 칠보문뚜껑 향로 등 341개 국보 중 6개가 향로다. 신과 소통하기 위해 향을 피웠던 옛사람들은 향로를 신을 담는 그릇으로 여겨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것이다.



차와 향을 위한 백자 도구를 만드는 신경희 작가의 향로 또한 섬세하게 빚고 새긴 솜씨가 탁월하다. 신비로운 푸른 빛이 감도는 단아한 백자로 수련 꽃봉오리를 피우고 도톰한 꽃잎이 흐드러진 찬란한 순간을 투각(윤곽만 파서 구멍이 나도록 만드는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들은 지난해 12월 갤러리 일지에서 열린 신경희 작가의 개인전 ‘여향(餘香)'을 통해 만났다. “사라져 가는 것이 섭섭해 남은 것이 흩어지기 전에 겨우 모양을 냈다”는 작가의 작업 노트 문장처럼 꽃향로에 작가가 붙잡은 여향이 깃든 듯, 향을 피우기 전부터 이미 보는 것으로도 향이 다가왔다.



이 전시가 열린 갤러리 일지는 향과 향 도구, 차를 소개하는 브랜드 ‘일지’에서 운영하는 전시 공간으로 향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일전에는 ‘향음'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말 그대로 향을 피아노 연주와 함께 듣고 느끼는 내용이었다. 향이 피어오르는 시간을 피아노 연주곡으로 작곡하고 직접 연주한 음악을 헤드셋으로 들으며 향을 마주하는 23분을 명상하듯 누렸다. 공간은 어두웠고 향로에만 핀 조명을 켜 향의 무대에서 작은 공연이 펼쳐지는 듯했다. 노영심의 연주곡 ‘향음 리버버레이션(Reverberation) 16’은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어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즐길 수 있다. 피아노 선율과 향의 선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그 멍한 순간이 어색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뭉클하다가 끝내는 고요해지며 소란한 마음이 진정된다.







내면과 소통하는 향기로운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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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민 작가의 자유분방하고 앙증맞은 분청향로. 박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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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왕실과 불교를 통해 본격적으로 사용된 향은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궁중에서는 국가행사 같은 각종 의례에서 향을 피웠고 궐내에 큰 향로를 설치해 항상 침향을 피우고, 임금의 교지를 받을 때와 사약을 받을 때도 향로에 향을 사르게 했다. 이로써 궁궐 안에는 향료를 관리하는 ‘향실(香室)’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향장(香匠)’이 향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왕실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향은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혼례를 치를 때 향로는 필수품이었으며 향낭이나 향갑 같은 장신구에 향을 담기도 했고, 옷을 보관할 때 방충과 방향의 역할을 하는 의향을 사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비들의 생활에서 향은 수양의 동반자였다. 책을 펼치고 시를 지을 때 향을 피워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이를 ‘훈목(薰沐)’이라 하며 생활화했다.



‘향을 피우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라는 뜻의 ‘분향묵좌’(焚香黙坐)하는 조선 선비의 심신 수양처럼 향을 사르고 싶다면 은성민 작가의 분청 향로가 좋겠다. 흙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울퉁불퉁한 표면과 불안정한 형태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해 무심(無心)의 철학이 서려 있어서다. 경남 양산 통도사와 가까운 작업실에서 인근의 흙과 전통 가마로 분청을 만들지만 그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고 추상적이며 과감한 작품을 빚는다. 지름 10㎝도 되지 않는 작은 분청 향로는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이 각기 개성이 있고 장난꾸러기 도깨비처럼 생겨 앙증맞고 친근하다. 은성민 작가의 분청 향로를 마련하게 되면 ‘깨비’라고 이름 붙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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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빈티지 그림책 일러스트를 닮은 오자크래프트의 향꽂이. 박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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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과 향 도구를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다면 오자크래프트의 향꽂이를 추천한다. 유럽의 빈티지 동화책 속 그림 같은 다양한 모양을 회색빛 유약으로 담백하게 마무리해 예쁘기도 하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다. 전통향 제조 명인과 함께 만든 향은 향꽂이와 함께 선물로 구성하기 좋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한 가닥 선향이 사그라지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해보자. 오래전에는 신과 소통하고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데다 향기롭기까지 하니 지혜로운 여름나기 도구임에 틀림없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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