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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아차!” 국회의원의 표결 실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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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새 국회 개원을 앞둔 시기에 으레 열리는 것이 ‘초선 의원 의정 연찬회’다. 재선 이상이거나 과거 의원을 해본 의원들이야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니 굳이 직무교육 같은 게 필요없다. 그런데 초선 의원들은 국회 건물 내부 구조는 물론 각종 투표 절차가 그저 낯설기만 하다. 개원과 동시에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전문가한테 배워야 한다. 올해도 4·10 총선에서 당선된 131명의 초선 의원을 위한 의정 연찬회가 22대 국회 개원을 열흘가량 앞둔 5월21일 실시됐다. 그들은 김진표 국회의장 등의 강연을 듣고 국회 본회의장 안에 들어가 전자투표 시연도 체험하며 의정활동에 관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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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1일 열린 초선 의원 의정 연찬회에 참석한 초선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전자투표 방법에 관한 교육을 받는 도중 일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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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국회는 지금과 같은 여소야대 구조였다. 여당인 민정당 의석이 야당인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세 정당 의석을 더한 것보다 적었다. 당시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은 공화당 김종필(JP) 총재와 비교적 가까운 사이였다. 반면 평민당 김대중(DJ) 총재나 민주당 김영삼(YS) 총재와는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정당과 공화당 의석을 더하면 원내 과반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해 6월 김용철 대법원장이 스스로 물러나면서 그 후임자를 뽑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법원장 임명은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의원 과반의 지지가 꼭 필요했다. JP는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민정당에 협조할 뜻을 분명히 했다. 자신감에 찬 노 대통령은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DJ와 YS는 정 후보자의 과거 이력을 들어 반대했다. 이에 평민당과 민주당은 ‘임명 저지’를 당론으로 정했다. 1988년 7월2일 오후 국회 본회의가 열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통과하려면 출석 의원 295명 중 과반(148명 이상)의 지지가 필수인데 민정당 123석에 공화당 34석을 더하면 이를 충족하는 만큼 청와대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찬성 141표, 반대 6표, 기권 134표, 무효 14표로 부결되고 말았다. 평민당·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기권표를 던질 것은 예상된 일이었으나 민정당·공화당 의원들의 찬성표 일부가 무효로 처리된 것이 승패를 갈랐다. 찬성하면 투표용지에 ‘가’(可), 반대하면 ‘부’(否)를 써야 하는데 두 당의 초선 의원 몇몇이 실수로 ‘정기승’이라고 이름을 적었다. 어떤 의원은 ‘정기성’ 또는 ‘조기승’이라고 이름조차 틀리게 썼다고 한다. 여당 지도부 입에서 “초선들 교육 좀 잘 시킬 걸”이란 탄식이 나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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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대표 등 국민의힘 지도부가 26일 사무처 당직자 월례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추경호 원내대표, 한 대표, 성일종 사무총장, 박정하 당대표 비서설장.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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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 때의 해프닝을 연상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25일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법안에 대한 국회 본회의의 재의 표결 과정에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출석 의원 299명 중 3분의 2인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재의결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거 반대표를 던지면서 찬성 193표, 반대 104표, 무효 1표로 예상과 같이 부결됐다. 그런데 국민의힘 의원이 108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최소 4명이 찬성으로 돌아선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찬성 입장을 공개한 안철수 의원을 제외해도 3명이 이른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지도부가 조사를 해보니 의원 3명이 ‘부’(否)를 잘못 표기하거나 잠시 착각한 나머지 ‘가’(可)라고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회의 표결에 익숙치 않은 초선 의원의 실수로 추정된다. 3명에 그쳤기에 망정이지 더 많았다면 용산 대통령실이 진노할 뻔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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