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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법조프리즘]미술진흥법 성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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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로펌 제이 대표변호사

[박주희 로펌 제이 대표변호사] 지난 7월 26일 ‘미술진흥법’이 시행됐다. 미술진흥법은 지난해 7월 미술 진흥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고 미술의 창작과 유통 및 향유를 촉진한다는 취지로 제정·공포된 법이다. 다만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미술계가 제도 변화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구체적인 조항에 따라 시행일을 공포일로부터 1년·3년·4년 후로 규정했는데 공포 1년이 된 올 7월부터 본격적으로 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데일리

올해부터 시행되는 내용은 크게 보면 미술계 지원을 위한 제도적 초석을 마련하는 것과 소비자 보호 등 공정한 거래 및 유통질서 조성을 위한 규정이다. 구체적으로 창작, 전시, 국제교류 및 해외 진출, 미술서비스업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 대상·방법·절차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고 소비자가 미술품 판매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진품증명서 양식과 미술 감정업자가 준수할 미술품 감정서 양식도 제정·고시돼 국내 미술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던 위작 문제나 비전문적인 감정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미술진흥법이 미술 진흥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가들의 권리 보호에 힘써야 한다. 미술 시장의 밑바탕이 되는 건 결국 창작자, 즉 ‘작가’이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진흥 정책은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진흥법은 2027년부터 미술품을 재판매할 때마다 판매가의 일정 비율을 작가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추급권’을 새롭게 도입하는 등 작가에게 합당한 경제적 보상이 돌아가도록 진일보한 제도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의 작가들이 마주하는 실상은 추급권은커녕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작품 판매수익도 제때 정산받지 못할 정도로 훨씬 더 열악하다.

미술 시장에서 작가의 작품 판매 대부분은 화랑을 통해 이뤄진다. 작가는 계약을 통해 화랑에 작품 판매를 위탁하고 화랑은 작품을 판매한 수익을 작가와 나눠 갖게 되는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정·고시한 미술분야 표준계약서에 따르면 화랑은 판매대금 수령일로부터 1개월 내에 정산하도록 돼 있지만 정산기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는 허다하고 아예 정산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화랑으로부터 정확한 판매내역 정보를 공유 받지 못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판매됐는지, 얼마에 판매됐는지조차 모르는 상황도 발생한다. 2022년 제정된 ‘예술인권리보장법’에 따라 예술인신문고에 신고된 예술인 권리침해행위 내역을 보면 신고 건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건 바로 ‘수익 배분 거부·지연·제한 행위’ 등이다. 작가에게 작품 판매대금은 근로자로 치면 월급과도 같은, 생계를 꾸려나가는 기초 수입임에도 제때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체불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실에 작가들 입장에서는 ‘추급권’ 같은 부가 수익은 별나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필자에게 화랑으로부터 오랜 기간 작품대금을 정산받지 못해 도움을 청한 작가가 있었다. 그는 매일 밤낮없이 그림만 그렸음에도 생계비 마련을 위해 결국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이제는 그림 그리는 기계가 아닌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술계 어딘가에는 정당하게 받아야 할 수익을 받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진흥 정책과 지원책이 마련되려면 정확한 실태 파악이 전제돼야 한다. 중장기의 정책도 필요로 하지만 당장 현실의 문제는 무엇인지 파악하고 하루빨리 해결할 수 있는 수단과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도 이제 미술진흥법에 따라 문체부 장관은 창작 및 유통 환경 등에 관한 실태조사를 매년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공표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됐다. 이를 통해 그동안 벙어리 냉가슴 앓듯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 미술계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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