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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국군포로에 대한 무관심,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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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서민의 정치 구충제]

생존자 이제 10명뿐… 배상금 줄 방법 없나

조선일보

일러스트=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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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조창호씨가 탈북했다. 1930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씨는 연세대 재학 중 6·25가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에 자원 입대한다. 1951년 5월, 조씨는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결국 북으로 보내진다.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 발각돼 ‘반동분자’가 된 조씨는 무려 13년간 아오지 탄광을 비롯한 강제 노역소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그 뒤에는 광부로 배치된다. 40년에 걸친 노역으로 돌가루가 폐에 쌓이는 규폐증이란 병에 걸린 조씨는 압록강변의 산간 마을로 보내지는데, 거기서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했고 한·중 간에 편지 교환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씨는 전쟁 이전 그의 친누이가 성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한 사실을 떠올려 그 주소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가 조선족 상인을 통해 성신여대로 전해지면서 조씨는 결국 목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땅을 밟은 조씨는 “6·25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국군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충격을 준 이유는 그동안 북한이 국군 포로를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국군 포로는 모두 스스로 원해서 북한을 선택해 ‘해방 전사(인민군)’로 편입됐으며, 휴전협정 당시 송환한 8726명 외에는 국군 포로가 한 명도 없다”는 그들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다.

조씨의 탈출 이후 80명 가까운 국군 포로가 탈출해 우리나라에 왔다. 북에 억류됐으리라 추정되는 국군 포로는 7만여 명. 진작 송환이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분이 대한민국에 정착해 여생이나마 편안히 보낼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2010년 이후 새롭게 탈출한 국군 포로가 없는 것을 보면, 그들 대부분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우리 정부가 그들에 대한 보상에도 인색했다는 점이다. 2004년 탈북한 포로 한 분은 “6·25전쟁에 참전했다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던 중 손가락과 발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으니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소송을 냈지만, 재판부는 그의 부상이 전투 때 입은 게 아닌 노역 중 입은 부상이라며 유공자 등록을 거부했다.

조선일보

사단법인 물망초 관계자들이 지난 2월 14일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에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상대로 한 탈북 국군포로 추심금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를 마친 후 패소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서울중앙지법에서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받은 승소 판결을 토대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서 추심금을 받으려 했지만 2심에서 패소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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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2004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돌아오려던 국군 포로 한만택(당시 72세)씨는 정부의 무성의한 대처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결국 북송되고 마는데, 사망한 군인 유해까지 찾아내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미국의 예를 떠올리면, 생존한 국군 포로에게 이리도 냉정한 건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한만택씨는 남한 땅을 끝내 밟지 못한 채 숨졌고, 격분한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다. 1심 결과는 국가가 1억원을 물어주라는 것. 이를 계기로 국군 포로와 유족들의 소송이 이어지는데, 한씨처럼 중국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북송된 이강산(87)씨 가족도 1심에서 3500만원 배상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이씨와 한씨 모두 2심에선 ‘국가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으니 말이다.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북한 인권 단체인 ‘물망초’는 소송 대상을 정부에서 김정은으로 바꾼다. 2016년 10월, 국군 포로 한재복(82)씨와 노사홍(87)씨가 33개월간 탄광에서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김정은을 상대로 임금과 위자료 등 각각 1억6800여만원을 청구한 것이다. 승소할 경우 돈은 어떻게 받아낼지가 문제였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더 정확히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에는, 북한에 줄 돈이 쌓여 있었다. 경문협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KBS나 MBC 등 국내 방송사가 조선중앙TV 영상 등 북한 관련 저작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북에 보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북한은 우리에게 저작권료를 한 푼도 안 주는데 왜 우리만 주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경문협 이사장이 그 유명한 임종석이고, 송영길·우상호 등이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단체의 목적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2005년부터 경문협이 북한에 보낸 저작권료는 무려 8억원, 그런데 2008년 금강산 관광을 간 박왕자씨가 북한 경비병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부터는 송금이 중단됐다. 임종석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떠올리면 마음이 아픈데, 그 후에도 경문협은 북에 돈을 보낼 그날을 기다리며 국내 방송사에서 꼬박꼬박 저작권료를 받았으니, 그 액수가 무려 20억원이나 됐다. 2020년, 1심 결과가 나왔다. 김정은이 두 분에게 2100만원씩 지급하라고 한 것. 원래 소송액인 3억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북한의 불법성을 인정한 소중한 승리였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등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을 때는 “자랑스럽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포로의 승리 소식에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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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이 2020년 8월 광주 남구청 대회의실에서 '새롭고, 지속적인 남북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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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공탁금이 23억원으로 늘어난 경문협에서 배상액을 타내면 끝나는 일. 원고 측은 경문협 돈에 대해 ‘채권 압류 및 추심 명령’을 신청했고, 이를 법원이 승인했다. 그 뒤 김정은을 상대로 한 수많은 소송이 이어졌다. 국군 포로 5명이 추가로 소송을 냈고, 6·25 때 아버지가 납북된 여성, 68년 무장 공비에게 일가족이 살해된 이, 서해에서 피살된 공무원의 유족, 연평 해전 전사자의 유족 등등도 소송 대열에 합류했다. 여기서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다. 경문협이 돈을 못 주겠다고 버틴 것이다. “조선중앙TV는 북한과 다르”며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이들의 재산권도 보장돼야 하는 것이 우리 헌법의 가치”라는 게 임종석의 말. 그의 뜨거운 헌법 사랑에 감동했을까. 기다리다 못한 국군 포로들이 경문협을 상대로 배상액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경문협 손을 들어줘 버린다! 소송에선 이기고 정작 돈은 받지 못하는, 허울뿐인 승리. 이건 그 후 이어진 다른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2월, 김정은에게 가장 먼저 소송을 낸 한재복씨가 별세한다. 돌아가시기 직전 그가 했다는 “국군 포로 문제에 정치권이나 사회나 관심을 갖지 않아 섭섭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하다. 국군 포로를 차갑게 외면한 자칭 인권 변호사 문재인, 자기 돈도 아닌데 줄 돈을 안 주는 임종석이 천하의 나쁜 놈인 건 당연하다. 아쉬운 것은 윤석열 정부도 국군 포로에 대한 해법 마련에 소극적이라는 점. 국군 포로에 대해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고 그 뒤 우리 정부가 북한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식으로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해 줄 수는 없을까. 이제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는 겨우 10명, 그분들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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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1951년 중공군에 의해 국군 포로로 붙잡혀 납북됐다가 1994년 기적적으로 탈출해 생환한 조창호(1930~2006)씨.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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