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3 (금)

빈에서 국가인권위 설립의 단초를 얻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1993년 6월 오스트라이아 빈에서 유엔세계인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유엔 누리집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1993년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열린 유엔세계인권대회는 ‘비엔나 선언 및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이에 대해 조효제 교수가 한겨레에 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적이 있다.



“비엔나선언은 사회권이든 자유권이든 모든 인권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한덩어리이고(불가분), 모든 권리들이 서로 기대어 있으며(상호의존), 모든 권리들이 서로 연결된다(상호연관)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 인권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자유로서의 발전’ 원칙도 이때 나왔다.” 그렇지만, 이 선언에서 “인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거시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은 건 결정적인 오류”라고 지적했다. 생태, 세계화, 신자유주의, 불평등과 같은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회에 참가했지만 이런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 사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다. 나는 실종이나 고문에 꽂혀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최동 고문 사건 등 고문과 관련한 죽음을 전국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엔나 유엔세계인권대회에 나가기 전부터 고문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최동은 인노회(인천부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고, 석방된 다음에는 고문 후유증을 앓았다. 그는 1990년 8월, 고통 속에서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이 자살로 세상을 떠나자 낙담한 최동의 아버지는 아들의 49재 뒤에 생을 마치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최동 사건 관련해서 경찰에 밀고한 사람으로 의심받는 자가 같은 인노회에 있었던 김순호였다. 그는 경찰에 특채되었고, 윤석열 정권에 들어와 경찰국장이 되었다. 이런 사건들로 유가협에서 고문 관련 사업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문 생존자 지원단체를 만나다





1993년 5월말에 연세대 선배 문국진의 고문 사건을 알게 되었다. 문 선배 부인 윤연옥 씨가 진영종 선배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다. 문 선배는 1986년 수배 중에 경찰에 자수하였는데 그때부터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고, 고인이 된 이을호 선배도 그런 증세를 보였다. 고문 후유증이 심각했던 것이다.



빈 현지에서 고문 전문 단체였던,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국제고문피해자재활협회(IRCT·International Rehabilitation Council for Torture Victims) 관계자를 만난 기억이 특별하다.



“3일 동안 잠을 안 재우면서 고문을 가하면 70% 정도는 정신병을 얻는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단체 관계자가 자료를 설명하면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경찰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시민을 둥그런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몇 시간 서 있게 하는 것도 모욕을 준 것이므로 고문에 해당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그런 식이면 한국의 수사기관은 일상적으로 고문을 행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한국의 인권 상황은 국제 인권기준과는 너무도 동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한겨레

1993년 6월 오스트라이아 빈에서 유엔세계인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유엔 누리집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단체는 제3세계 고문 생존자들의 재활을 위해서 전문적인 시설과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란 용어도, 고문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는 공소시효가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남미 단체들로부터는 ‘불처벌’(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 문제)이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통역이 전해주는 단편적인 얘기들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중요한 정보였다. 우리 대표단은 그곳에서 유엔이 회원국들에 국가인권기구를 권고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 권고를 기억한 대표단은 훗날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인권운동가의 꿈을 안고





열흘 중에 이틀은 빈 시내에 나가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내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준 사람은 서준식 선배였다. 서준식 선배는 비전향장기수로는 최초로 석방된 사람이었다. 그는 유가협 생활공동체인 ‘한울삶’에 자주 들러서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간첩 조작 사건’을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나간 빈은 고색창연한 중세의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중에 유명한 슈테판 대성당도 보았다.



회의장은 비엔나 국제 센터, 숙소는 인근 공원의 캠핑장이었다. 회의장과 숙소까지는 재독 동포가 승합차로 데려다주고는 했다. 1주일 정도 지나니 슈퍼마켓에서 손짓 발짓으로 물건을 구매할 정도가 되었다.



이 대회 이후 한국의 인권운동은 국제적인 시야를 얻게 되었다. 유엔을 비롯한 인권 관련 국제기구와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같은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을 알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국가보안법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 경험은 2년 뒤에 국내에서 ‘국가보안법 국제 심포지엄’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엔 회의장에 모인 정부대표단을 압박하는 비정부기구(NGO)들, 남녀 동수로 발언자를 정하던 회의 규칙, 젊은 청년들이 거침없이 발언하는 모습들, 인종과 피부색, 문화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연대해가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인상 깊게 간직하고 귀국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나는 ‘인권운동은 해볼 만한 매력적인 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겨레

1993년 6월 유엔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민간단체들이 주최한 행사에서 전세계에서 온 활동가들이 연대의 손을 잡고 있다. 필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빈에서 돌아오니 최봉규(최우혁 열사의 부친) 총무님이 나를 불렀다. “문화제 재정 펑크(적자) 난 거, 잘 정리되었으니 걱정 마라”고 하셨다. 빈에 나가 있으면서도 1천만원 이상 적자 난 게 고민이었는데, 총무님이 해결해주셨다. 총무님이 문화제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문화일꾼’들에게 전화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고, 사정을 안 그들은 최소한의 경비만 받고 정리하기로 했던 것이다. 판을 벌여 놓고 책임지지 못해서 참 많이 미안했다.



귀국한 다음에 빈에서 가지고 온 자료를 정리할 새도 없이 다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93년 9월18일 유가협 제8차 총회가 성균관대에서 열렸다. 총회 전날, 전국에서 유가족들이 올라오셨다. 오랜만에 만난 유가족들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였고,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나도 늦은 밤까지 총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총회 현장에서는 분위기가 확 달랐다. 유가족들이 집행부를 성토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당시 회장은 박종철 열사의 부친인 박정기 아버님이었는데, 회장단이 정치권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비롯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그대로 옮겼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어젯밤만 해도 오순도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의 유가족들이 낯빛을 바꿔서 주로 유가협 3인방(이소선, 박정기, 배은심)을 집중 성토했다. ‘이게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하는 생각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소문들에 대해서 해명해도 듣지를 않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서 박정기 회장은 연임할 수 없었고, 다른 분이 회장이 되었다. 박정기 회장에 대한 불신임은 사무국장이었던 나에 대한 불신임이기도 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할 말은 참 많지만,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정든 유가협을 떠나다





총회가 끝나고 난 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말이다. 근거 없는 소문만 듣고, 회장을 바꾸기로 미리 말을 맞추고 총회에 온 것이었다. 총회에서 투표로 회장을 바꿀 수 있고, 유가협 회원이니 누구라도 회장이 될 수 있는 것이 맞지만,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서 회장을 경질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던 나는 유가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문의 편지를 썼다. ‘어머님, 아버님들을 믿고 뼈를 갈아 넣으면서 일을 해왔지만, 제가 부족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같은 내용이었다. 유가족들과 울고 웃던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동생을 떠나 보낸 1988년 이후 5년 넘게 정들었던 유가협과, 열사와 의문사 사건 자료를 정리하고, 사건들을 해결하려고 부심했던 나날들,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다. 유가족들을 믿었는데, 그 믿음 하나로 버텼는데,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 믿음이 무너진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유가협을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더는 이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피눈물이 났다. 그 편지를 복사해서 전국의 유가족들에게 보내고, 짐을 꾸려서 한울삶을 나왔다.



유가족들과 후원회 분들, 함께 일했던 사무국 간사들이 눈에 밟혔지만,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정든 그 사람들은 그 뒤에 한울삶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야 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목소리에 힘을 더해주세요 [한겨레 후원]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