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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함인희의 우문현답] 졸업식, 경건한 의례에서 경쾌한 이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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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투데이

8월 말 대학가는 코스모스 졸업 시즌이다. 원래는 2월 졸업이 주류이고 8월 졸업은 비주류였지만, 요즘은 거의 비슷한 비율로 가을 졸업을 선택한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면 조기졸업이라 하고, 1~2년간의 휴학이 필수인 데다, 졸업 유예 신청도 빈번해지다 보니 ‘입학 동기=졸업 동기’ 등식도 깨졌다.

덕분인가 사은회의 추억도 가물가물하다. 1980년 겨울,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학교에서 교수님들 모시고 사은의 밤 촛불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생생한데, 막상 교수가 된 1995년 이후엔 사은회에 초대받은 기억이 한 번도 없다. 돌아보니 대학 졸업의 의미와 함께 졸업식 풍경도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인생에서 한번 거치는 ‘즐거운 이벤트’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 졸업식장에 단골로 등장하던 풍경은 부모님께 대학 졸업가운을 입혀드리고 학사모를 씌워드린 후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이었다. 학사모를 쓴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큰 절 올리는 효자 아들 모습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논밭 팔아 대학 등록금 내느라 허리가 휘던 부모님들에게, 오빠와 남동생 학비를 대느라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든 누이들에게, 아들이자 오라버니(남동생)의 학사모는 집안의 영광이자, 미래를 밝혀줄 청신호였다.

당시의 대학 졸업식은 부모 입장에서 볼 때, 드디어 내 자식이 공식 교육 16년을 모두 마쳤다는 뜻깊은 의미가 있었고, 졸업생 마음속에도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부모님과 자매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자 오라버니가 되리라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대학가 졸업식 풍경은 경건한 의례에 담긴 진중한 의미를 버린 지 오래다. 이미 대학 진학률 세계 1위 국가답게 대학을 동경하는 부모 세대도 대학에 한 맺힌 자매 세대도 사라졌다. 대신 대학 졸업식은 인생에 한 번뿐인 즐거운 이벤트로 변신했다. 남녀 불문하고 졸업사진 찍는 데 제법 큰돈을 들여 정장도 마련하고 꽃단장도 한 지는 오래되었다. 요즘은 사진작가(처럼 보이는)를 고용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교정 곳곳을 다니며 자신들만의 추억을 담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결혼식은 여러 번(?) 할 수도 있지만 졸업식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기에’ 더욱 공을 들인다고 한다.

졸업식 당일에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대신 졸업식장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취업 못한 친구들이 대거 불참한다는 소식은 이젠 옛말이고, 진짜 속내는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졸업장을 받았는데, 정작 대학졸업식에선 ○○ 단과대 ××× 외 몇 명 속 익명적 개인 속에 포함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세대는 ‘트로피 키즈’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어린 시절부터 다채로운 수상경험을 다져온 세대이기에,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이리라.

삶의 중요 순간 담은 가치는 잊지 말길


비단 졸업식뿐만 아니라, 요즘 세대에겐 삶 자체가 이벤트의 연속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결혼식만 해도 친구 및 직장동료 중심의 신나는 놀이 프로그램이 주례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고 있듯이 말이다. 심지어 예전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앞에 걸어두던 금줄 풍습도 아파트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앙증맞은 상품문화로 거듭났다. 금줄을 걸어 출생의 소식을 알리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아이를 보호하고자 했던 의례의 진의(眞意)가 사라진 자리에, 임산부가 직접 만드는 금줄 키트도 등장했고, 다양한 재료 및 다채로운 모양의 ‘무늬만’ 금줄 선물세트도 소개되고 있으며, 아기 침대 위에 모빌처럼 걸어두는 금줄도 인기라는 소식이다.

다만 이들 경쾌한 이벤트가 경박한 해프닝에 머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대학 졸업의 의미도, 결혼 및 출산의 의미도 롤러코스터 타듯 변화무쌍한 세태 속에서, 전통을 고집한다거나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지나갈 때마다 경건한 의례 속에 담아냈던 소중한 가치마저, 손쉽게 잊혀지거나 가볍게 날려버리진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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