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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슬픔과 비밀로 밀착된 세 친구… 작지만 꾸준한 성장기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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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펴낸 김애란

‘두근두근…’ 후 13년 만에 장편소설

고교 2학년 세 친구의 한 시절 그려

기존 성장소설과 다른 시선 돋보여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 많아

주인공 곁에 적극적 구원 아니어도

희미한 용기 주는 어른 두고 싶었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글도 손으로 쓰는 것이고, 그림도 손으로 그리잖아. 두 개의 손이 서로 연결될 수 있고. 게다가 무언가를 채우거나 지우는 그림의 행위 역시 문학하고 비슷한 지점 아닌가. 공을 굴리듯 여러 이야기를 굴렸다. 다른 형태의 창작물이나 창작자에 대해 살펴보기도 했다. 여러 이야기를 굴리던 어느 날, 단상 하나가 떠올랐다. 문학과 엇비슷해 보이는 그림에 대한 착상이었다고, 소설가 김애란은 당시를 기억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늘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전에 썼던 작품과 비슷한 주제로 이어가고 싶었지만, 소설가의 소설은 되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제 직업으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싶었거든요.”

세계일보

소설가 김애란이 세 고등학생이 함께 또는 각자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해 나가는 이야기를 서늘하고 치밀하게 그린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들고 돌아왔다.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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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되,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둘 다 손을 사용하고 무언가를 지우거나 채우는 행위가 비슷한 그림을 통해서 조금 우회하는 방식으로 써볼 수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주요 등장인물인 청소년들이 이야기를 가장 쉽게, 많이 접하는 매체가 웹툰이기에 그림에서 출발하는 게 설득력이 있겠다고.

맙소사, 무지개가 온통 검은색이잖아. 집필 과정에서 읽은 캐시 A 말카오디의 책 ‘학대받은 아동을 위한 미술치료’(학지사)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그린 무지개는 검은색이었다. 한 번도 무지개가 검은색일 것이라고 상상해 보지 못한 그에게 놀라움과 충격 자체였다. 글도 모르고 말도 못하고 있는 아이가 자신이 겪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다니. 그림이 아름다움과 쾌락에 복무할 수도 있지만, 친구들에게 위로를 주는 수단이 된다면….

몇 가지 모티브를 바탕으로 여러 개의 ‘판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쓰는 도중 자신이 쓰려고 하는 이야기가 자주 발견됐고, 때론 수정되었으며, 뒤집어지기도 했다.

소설가 김애란이 지우와 채운, 소리 세 고등학생이 함께 또는 각자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해 나가는 이야기를 놀랍도록 서늘하고 치밀하게 그린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의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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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제 속에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몇몇 기억 때문이었다. 지우는 그걸 이야기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82쪽)

최근 엄마를 잃고 반려도마뱀 ‘용식’과 살아가는 지우는 1년 전 빌라 옥상에서 목격했던 채운 가족의 ‘그 사건’을 둘러싼 감정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아서 만화 카페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지우는 한집에서 산 지 3년이 된 엄마의 애인 선호아저씨에게 짐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독립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 용식을 친구 소리에게 맡기고 지방의 노동 현장으로 간다.

1년 전 ‘그 일’ 이후 엄마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고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채운은 우연히 지우의 연재만화를 보게 된 뒤 친구가 그날 밤의 비밀을 아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에 사로잡힌다. 반려견 ‘뭉치’의 앞발을 잡은 소리가 “앞으로 뭉치랑 많이 놀아주라”는 말을 들었던 채운은 얼마 뒤 뭉치가 죽자 소리가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소리를 찾아가 입원한 아버지를 봐달라고 부탁하는데.

각자 상처와 비밀을 간직한 지우와 소리, 채운 세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비밀을 엿본 후 호감을 비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우정과 거짓말, 그림과 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특히 지우의 만화가 삽입돼 극적 재미와 함께 세 친구의 상처와 비밀이 연결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182쪽)

김애란은 왜 다시 청소년 이야기를 써야 했을까. 그가 상상하고 그린 청소년들과 가족, 성장, 비밀과 거짓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김 작가를 8월21일 기자간담회와, 다음날 전화통화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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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청소년 이야기로 돌아온 것인가.

“두 번째 장편이니까 조금 다른 이야기를 써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장편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 이를테면 이야기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사는가, 왜 자기만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가 등등. 첫 장편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것 같다. 이번 장편도 첫 장편의 다크 버전이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가족 혹은 성장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이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첫 장편을 쓸 당시는 젊은 나이여서 부모를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려고 하는 청소년이 등장했다. 아마 몸이 아프기 때문에 더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커서 그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인물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굳이 그렇게 어른을 이해해 주지 않으려고 해도 되는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도 벅찼을 텐데.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것이나, 그 방황을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해석하고 꾸려나가려고 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기성세대가 돼 청소년을 그릴 때에는 곁에 있는 어른들의 위치가 좀 달라졌다. 이 친구들한테, 아주 적극적 구원은 아니더라도, 희미한 용기나 약간의 디딤돌이라도 돼줄 수 있는 어른들을 조금은 두고 싶었다. 아울러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조금 변한 것 같다.”

1980년 인천에서 나고 충남 서산에서 자란 김애란은 대학 재학 중인 2002년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대산대학문학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등을 발표했다.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을 쓴 지 벌써 23년이 됐다니.

“에너지의 양이 아니라 에너지 종류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화력발전소에서 수력발전소로 바뀐 느낌이랄까. 이전에는 제가 어떤 경험이나 기억을 태워서 그 에너지로 글을 썼다면, 이제는 낙차를 이용하는 수력발전소처럼 경험에 시차나 위치 변화를 에너지 삼아 이야기를 쓰는 기분이 든다. 함께 일하는 분들의 얼굴도 신인 때보다 더 잘 보이게 됐다.”

마치 앞머리로 고양이를 닮은 눈빛을 가리려는 듯, 그는 기자간담회 내내 단정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모든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치 교열을 보듯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골라 또박또박 대답했다. 전화통화에서도 이러한 자세는 이어졌다.

루틴을 잘 지키는 동료들을 보면 부러울 정도로 자신의 루틴은 불규칙하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낮에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마감 때가 되면 자주 낮밤이 바뀌기도 한다고. 그럼에도 마치 운동선수가 근육을 기르듯, 김애란은 집필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어나면 먼저 음악을 듣거나 활자랑 친해지려고 하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오래지 않더라도 뭔가를 읽고 꾸준히 메모하고. 기사를 보든, 책을 읽든, 어떤 콘텐츠를 보든…. 구원이란 극적 탈출이 아니라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나는 것이란 걸 아니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 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202~203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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