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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단독] 유창준 前 국정원 방첩국장 “정보 수집 넘어 영향력 공작까지… 시대 맞게 간첩법 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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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사전 협의하는 백색요원 외에

흑색·회색요원, 위장신분으로 잠입

우리 공직자, 해외서 체포 공작 표적

위기 넘기려 포섭 당하는 경우 많아

1996년 러서 최덕근 영사 피살처럼

신분 노출 순간 신변 안전 장담 못해

형법, 日 모방해 1953년 만들어져

합리적 논의 거쳐 변화상 반영해야

군 정보요원 신상정보가 무더기로 털린 전대미문 사태를 계기로 우리 국가기밀을 가로채려 국내에 잠입한 외국 간첩이 얼마나 많고, 이들의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으며,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세계일보는 유창준 전 국가정보원 방첩국장을 지난 27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나 외국 간첩들의 활동 유형과 국내 정보원 포섭 수법 등에 대해 들어봤다. 유 전 국장은 “자세한 내용을 밝히는 것 자체가 자칫 우리의 첩보수집 역량을 드러내는 일과 같다”며 제한적 범위 안에서 설명했다.

세계일보

유창준 전 국가정보원 방첩국장이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군 정보요원 신상정보 유출 사태의 심각성과 외국 간첩들의 국내 활동 실상 등을 설명하며 간첩을 처벌 못 하는 현행 간첩법 개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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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전 국장은 “간첩 행위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며 “간첩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하는 현행 간첩법(형법 98조)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국정원 방첩국장은 외국에서 국내로 잠입하는 간첩의 국가기밀 탈취 행위를 방어하는 작전의 선봉장이다. 업무 특성상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내밀한 기밀정보를 알고 있다 보니 반국가세력의 표적이 될 수 있어 외부 노출이 제한적인 편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에 정통한 한 인사는 “미 CIA를 상징하는 인물이 누군가. CIA의 국장이다. 국정원 방첩국장은 그런 위치”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유 전 국장과 일문일답.

―국내에서 활동 중인 외국 간첩이 얼마나 많은가.

“적나라하게 말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달라. 국정원을 비롯한 방첩기관이 간첩의 신분을 파악하고 활동을 추적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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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간첩은 국내에 어떻게 들어오나.

“많은 정보기관 요원이 국내에 들어와 있다. 양국 간에 어느 정도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 ‘우리가 몇 명 보낼 테니 당신들도 몇 명 들어오는 것이 좋겠다’고 사전 협의해 백색 요원이 합법적으로 오간 경우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자라니 회색 또는 흑색 요원을 잠입시킨 것이다. 흑색 요원은 학원 강사나 유학생, 상사 주재원, 심지어 사업가로 위장 신분을 갖추고 들어와 있다.”

―외국 간첩 적발 사례를 설명해달라.

“대부분 중간에 내국인이 관련돼 있다. 우리 측 해외 주재 무관이 외국 기관에 포섭돼 귀국 후 협조자로 활동하다가 검거된 일이 있다. 본인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사실은 다량의 군사기밀을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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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섭은 어떻게 되나.

“예를 들어 우리 공직자가 해외 근무 중 술자리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시비가 붙는다. 이후 수사기관이 체포한다. 이 사람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평소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현지인을 부른다. 그럼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이후 라포(신뢰관계)가 형성된다. 그렇게 시작된다.”(군검찰은 정보사 기밀을 유출했다가 최근 적발된 군무원도 중국 측에 포섭된 뒤 억대 금품을 받은 대가로 범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유 전 국장이 말한 ‘내국인’을 활용한 국가기밀 탈취의 대표적 사례다.)

―정보사 요원 신상 유출이 가져올 파장은.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영사관에 근무하던 최덕근 영사처럼 살해당한다. 그래서 신원은 철저히 보안 유지가 돼야 한다. 명단을 넘긴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살인 행위와 똑같다.”(이번에 적발된 정보요원 신상유출 행위가 북한과 연계됐는지를 밝히지 못할 경우 간첩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현행 간첩법이 ‘적국’ 즉 북한 간첩만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간첩법 개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여야가 앞다퉈 간첩법 개정안을 발의한 만큼 22대 국회에서 법 개정이 절실하다. 유 전 국장은 “과거 우리가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던 시절엔 외국 간첩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요인이 적었다”며 “지금은 다르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다. 지킬 게 많아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신냉전 구도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굉장히 높아졌다. 간첩죄 개정을 통한 국가기밀 보호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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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상 ‘적국’을 ‘외국’으로만 고치면 해결될까.

“더 나아가야 한다. 과거엔 정보만 수집하고 갔다. 지금은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영향력 공작’(인지전) 단계로 넘어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해 대한민국 국민의 생각을 지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단 것이다. 가짜뉴스를 유발하거나 허위사실을 퍼뜨려 혼란을 조장하는 식이다. 이를 막기 위해 국민의힘 강승규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강유정 의원이 간첩죄를 포괄하는 ‘국가안보죄’를 발의했다. 상당히 진일보한 법안들이다. 지금 형법은 일본의 전시 형법을 모방해 1953년 만들어졌다. 합리적 논의를 거쳐 시대 변화를 반영한 법 개정을 시급히 해야 한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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