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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물체의 본질 꿰뚫는 ‘위상수학’에 큰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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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의 중인 권경환 교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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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권경환은 경기중학교를 거쳐 해방 뒤 신생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이 나자 피난길에 올라, 부산으로 옮긴 서울대에서 1952년에 졸업했다. 그해 3월11일 부산 서울대 천막교실에서 개최된 대한수학회 발족식에 권경환 학생이 참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전쟁의 와중에도 공부를 놓지 않던 젊은이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타이나 말레이시아보다 국내총생산(GDP)이 낮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디지털 시대의 리더로 이끈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남다른 교육열 때문일 거라는 분석에 큰 이견은 없다. 자기 자녀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간절함과 교육과 학문을 존중하는 문화적 토대는 전쟁의 와중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권경환은 1953년에 미국 미시간대로 유학을 가서 레이먼드 와일더의 지도로 위상수학을 전공했고 1958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라울 보트 밑에서 위상수학을 공부하던 스티븐 스메일과 함께 공부했고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그보다 한해 먼저 졸업한 스메일은 현대 수학의 오랜 난제이던 푸앵카레 추론을 5차원 이상에서 증명해 1966년 필즈상을 받았다.

최고 학술지 ‘수학연보’ 논문만 15편

학위를 받고 1959년에 귀국한 권경환은 서울대 대우부교수로 부임했다. 그즈음 한국은 4·19혁명(1960년)과 5·16 쿠데타(1961년) 등으로 혼돈의 시기를 겪었다. 5·16 이후에는 대한수학회를 포함한 모든 학술단체가 해산됐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그는 두명의 석사를 배출했는데, 두 학생(김재필과 박세희) 모두 수학 연구를 계속해 나중에 서울대 교수가 됐다. 권경환은 혼란에서 벗어나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1962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단순한 공간인 유클리드 공간이 다양체(manifold)가 아닌 두 공간의 곱으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결과를 수학 분야 최고의 학술지로 불리는 ‘수학연보’(Annals of Math)에 게재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권경환은 1964년 젊은 수학자들이 선망하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의 연구원으로 가게 됐는데, 이곳에서 한국인 물리학자 이휘소를 만나서 교류했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이 시기에 연구자로서의 정점에 다다른 그는, 다양체의 본질적 불변량이 곱하기 등의 연산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규명하는 등 최고의 논문들을 쏟아냈다. 그가 평생 ‘수학연보’에 게재한 논문만 15편인데, 한국 수학자가 이 기록을 깨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1965년에 미시간주립대로 옮긴 그는 25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13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10년 동안 학과장을 지냈다. 학과장 재임 기간에는 양과 질에서 학과를 크게 발전시킨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1970년대에도 틈틈이 한국을 방문하여 수학도들에게 위상수학 분야를 소개하는 노력을 하였는데, 1975년과 1979년에 집중적인 강연 활동의 기록이 있다.

권경환은 미시간주립대 재직 시기에 만난 신생 포항공대의 김호길 학장의 설득으로 61살이 되던 1990년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포항공대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정년퇴임한 1999년까지 수학과 주임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내며 연구 중심 대학의 수학과를 구축하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권 교수를 처음 만난 건 1994년 포항공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오랜만에 찾은 고국이었고 평생 처음 가본 도시였다. 학위 취득을 앞둔 대학원생으로서 연구 결과를 세미나에서 발표하러 간 것인데, 그는 학과의 최고 연장자이면서 가장 유머러스한 분이었지만 연구에 대한 태도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권경환은 1950년대 말 학위 취득 뒤에 귀국해서 가르치던 3년 동안에만 세명의 대통령을 겪어야 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는 게 녹록했을 리가 없다.

그가 평생 연구한 위상수학은 사물의 모양을 연구하는 분야다. 거리나 크기 개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기하와는 다른데, 외형의 변화와 무관한 본질을 본다는 게 핵심이다.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를 그릴 때, 실제 지도와 다르게 변형하더라도 연결성이 동일하다면 노선도로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상기하면 된다.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진흙으로 뭉친 공으로부터 큐브를 만드는 것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므로 쉽다. 하지만 공으로부터 도넛을 만드는 것은 간단치 않다. 뭔가 구멍을 뚫어 일부 진흙을 없애야 한다. 그래서 공과 도넛은 위상적으로 ‘다르다'. 위상적으로 동일한 물체들은 불변량이라는 성질을 공유한다. 위의 예에서 도넛은 구멍이 하나이고, 공은 구멍이 없다. 구멍의 개수는 지너스(genus)라고 불리는 불변량인데, 위상적으로 동일한 물체들은 이러한 불변량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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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빅데이터까지 응용 혁신

한겨레

생전의 권경환 교수(가운데).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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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수학 분야에서는 20세기 내내 수학자들을 괴롭혔던 푸앵카레 추측이란 난제가 있었다. 유한하고 끝이 없고 단순한 공간은 구(球)뿐이라는 추측인데, 이 추측은 수학 분야 최고의 상인 필즈상이 3개나 수여된 문제다. 5차원 이상과 4차원에서 각각 해결돼 스티븐 스메일(1966년)과 마이클 프리드먼(1986년)에게 필즈상이 수여됐고, 마지막 난공불락이던 3차원 푸앵카레 추측을 해결한 그리고리 페렐만이 2006년에 마지막으로 필즈상을 받았다(본인은 수상을 고사했다).

순수수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위상수학은 20세기 말에 큰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핀과 같은 원자 하나 두께의 2차원 물질은 그 물성이 통상의 물질과 너무 다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위상수학을 사용하는 위상물리학에 2016년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됐다. 또한 빅데이터의 모양을 보는 관점으로 위상수학을 사용하는 위상적 빅데이터 분석(TDA)을 통해 당뇨병과 유방암의 예측과 진단이 가능해졌고, 이를 상업적으로 구현한 회사(아야스디·AYASDI)도 출현했다. 비본질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물체의 본질을 보는 위상수학의 관점이 만들어낼 혁신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권경환은 1999년 퇴임하면서 한국 수학의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권경환 석좌기금’을 출연했고, 2001년 김강태 교수를 시작으로 3년마다 선정된 수학자를 지원하고 있다. 2018년, 권경환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아주대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후 미국 유시(UC)버클리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등과학원·포항공대 교수를 지냈고 아주대 총장을 역임했다.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과 한국인 최초의 국제수학연맹 집행위원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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