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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시인 80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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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국 현대 시집 1세기’를 계기 삼아 한겨레가 창비 시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을 통해 시집을 출간한 적 있는 시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가장 좋아하는 시인 5명’의 상위 그룹에 언급된 시인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종삼, 김소월, 황지우, 허수경, 이상, 김혜순.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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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가 올해 101살,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담은 주요한의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은 100살, 근대문학사에서 대중 시집의 전범을 세운 김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이 99살 되는 해다. 한국 시집 100년의 경계. 시인들에게 당신의 시인, 당신의 소설가, 당신의 자긍심과 안부는 물론 문학판의 공정성, 현 정부 출판 정책에 대한 평가, 21세기 반시적(反詩的) 사건 등 30여가지를 물었다. 한국 문단사에 없던 방식과 규모의 설문조사다. 2회에 걸쳐 2024년 ‘시인의 초상’을 그린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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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인들의 시’로 꼽힌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다. 1948년 10월 문예지 ‘학풍’에 실린 이 시를 끝으로 남쪽에서 백석의 시는 더 볼 수 없게 된다. 고작 94편 남기고 그해 신의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간 때문이다. 시는 그 귀향길을 상상했던 것일까. “나 혼자도 너무 많”다는 백석을 많은 현역 시인들이 어떻게 품어왔는지 이번 조사로 여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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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와 시집 그리고 시인의 시인





올 상반기 창비·문학과지성사 시선 출신 시인 80명이 ‘지난 100년, 가장 좋아하는 국내 시’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꼽았다. 2위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해 백석 시 8편(총 32표)이 전체 255편에 들었다. 시인들은 “방언 구사와 초현실적 현실 처리”의 매력, “인간적 정서와 구체적 경물이 어우러져 깊게 울리는 절창” 등으로 백석 시를 평가했다.



‘최애 시 목록’에 가장 많은 시를 배출한 이는 14편의 김수영(총 33표), 11편 김종삼(총 18표), 10편의 서정주(총 18표) 순이다. 2000년 등단한 한 시인은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을 꼽으며 “수영의 시는 이상적인 시민이라기보다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현실적인 시민상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현역 중엔 이성복(9편·10표), 황지우(5편·5표)에 이어 4편씩의 김혜순(5표)·신해욱(4표), 3편씩의 김행숙·백무산·심보선·오규원·이수명·이장욱·이제니·장석남·진은영 시가 많이 들었다.



‘남의 김수영, 북의 백석’은 ‘가장 좋아하는 시인 5명’을 묻는 항목에서도 확인된다. 나란히 33표로 1위를 차지했고, 김종삼(18표), 윤동주(17표), 최승자(16표), 기형도·김소월(14표), 정지용·허수경(11표)이 뒤따랐다. 단독적 시 세계에 더불어, 시의 사회성, 시인의 삶을 평가한 응답자들이 많았다. 한 시인은 윤동주-정지용-백석-김수영-신경림을 차례로 꼽아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꺼내 경전처럼 꺼내 읽는 시인들”이라며 “시도 좋지만 이 시인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삶도 떳떳했다”며 김소월-정지용-윤동주-신경림-허수경을 솎은 또 다른 시인도 이유는 비슷하다. 남성 대세에서 최승자·허수경의 족적이 또렷하다. 전체 거명된 110명 가운데, 12표의 황지우가 현역으론 으뜸. 이성복(10표), 김혜순(7표), 장석남(5표)이 뒤를 이었다. 이편의 김혜순과 황지우는, 저편의 허수경·서정주와 함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집 3권’ 목록(전체 118종)에 각기 4종씩 꼽혀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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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호의 스펙트럼은 실로 광대하다. 교직자였던 한 시인은 “김소월에 비해 백석이 너무 과대 포장됨. 마찬가지 이유로 김수영 대신 김춘수”라며 김춘수의 ‘처용’, 서정주의 ‘동천’, 이상의 시전집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시인 박상순 역) 3종을 ‘최애 시집’으로 내밀었다.



시·시집 애호도 조사에서 주요 순위 밖 장석남·박용래·최정례·이장욱 등이 눈에 띈다. 최정례는 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등 2편과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을 각 항목에 올린 이로, 2021년 영면했다. 소설·평론도 쓰는 이장욱은 시집 3권, 시 3편이 각 부문에서 지목됐다.





한국 시 국면을 바꾼 시인의 현재성





위 세 질문의 답변 안에 한국 시집 100년의 국면이 모두 관통된다. 그 영향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2002년 등단한 한 시인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성복의 ‘정든 유곽에서’,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김소월의 ‘여자의 냄새’ 순의 5편을 ‘최애 시’로 꼽으며 “우리 현대시사의 핵심을 이루는, 변혁의 기점이 되었던 시”로 평했다. 좋아하는 시집으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과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을 꼽은 한 시인(2008년 등단)은 기형도를 “죽음을 테마로 한국 현대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시인”, 김혜순을 “그가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세계에는 국경이 없으며, 스스로를 매번 경신 중”인 “현재 한국 시의 간판”으로 평가했다. “작품만 봐도 누군지 알 정도로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들”의 “흉내 낼 수 없는, 문장 안에 신비로움을 품고 있는 시”로 “이러한 시들은 점점 더 찾아볼 수 없어서인지 애틋해진다”며 김이듬·임솔아·신해욱·이제니·이근화의 시를 추어올린 시인(2015년 등단)도 있다.



당대 시인들의 외국 시로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심보르스카)의 것이 독보적이다. ‘소개하고 싶은 외국 시(집) 3’에 110편·종 가까이 추려진 가운데, ‘끝과 시작’(17표), ‘검은 노래’, 유고시집 ‘충분하다’(이상 1표씩) 등 국내 출간된 시집 전부를 아울러 총 19명이 쉼보르스카의 작품(특정 시 수록 시집 포함)을 추천했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두 번은 없다’)고 위로하며 노벨 문학상(1996)을 받은 여성 시인이다.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10표),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2표)로, 울라브 하우게(올라브 헤우게)는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6표),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2표)로 다음 많이 호명됐다. ‘두이노의 비가’ 등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총 8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파블로 네루다(칠레),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등의 자크 프레베르(프랑스, 이상 6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아르튀르 랭보, ‘단 하나의 눈송이’ 등의 사이토 마리코(이상 5표)가 뒤를 이었다. 일본 시인 미즈노 루리코(‘헨젤과 그레텔의 섬’), 다니카와 슌타로(‘이십억 광년의 고독’) 등이 3표씩 받으며 주목을 받은 반면, 페르난두 페소아와 앤 카슨 등은 2표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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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자의 시간





최근 출판계에선 ‘2030 독자’의 시 문학 유입 추세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잖다. 1980년대 ‘시의 시대’에 견줄 바 못 되나, 쇼트폼과 영상의 시대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시의 생태는 여전히 도드라진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시인들 열에 일곱이 “국외에 견줘, 국내 시인과 시집이 매우 많다”(30%)거나 “많은 편”(40%)이라고 볼 정도다. 이런 평가는 세대 전반에서 골고루다.



다만 질적 평가는 다르다. 현대시와 독자의 괴리가 명확한지, 그 경우 무엇이 원인인지로 비롯한다. 스마트폰, 소비자본주의 등 외부 요인을 차치한다면, 시의 난해성이 첫 쟁점이다. “언어적 기술에만 치우친 난해한 요즘 시”(1990년 등단 시인) 내지 “해석하기 어려운 시만 등단시키고 출판, 평론하는 세태”(2014년 등단 시인), “전체적으로 시가 너무 길어지며, 시의 본령인 압축미나 리듬, 긴장감을 잃어버렸다”(2011년 등단 시인) 지적하는 부류와, “시가 어려워져 멀리하기보다 책, 문학과 멀어지”(2019년 등단)거나 “독서문화가 황폐해진 것”(2001년 등단 시인)으로, 되레 “행·연을 가른 것만 시가 아닌, 모바일 이모티콘, 문자 등 다양한 형태로 대중들은 시적 쓰기·읽기에 열렬히 참여하고 있다”(1981년, 1989년 등단자) 보는 부류가 맞선다. 2015년 등단 시인은 이를 “시와 독자의 진화 과정”으로도 본다. 1999년 등단 시인은 “자발적으로 시를 찾고 배우고 쓰는 사람도 많다”면서도, 문학적 권위주의, 문학집단의 시대착오(권력편중이나 성추문들) 등에 대한 대중의 염증을 더 중요한 실태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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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당대 시인들의 ‘시인으로서의 자긍심’(0~10점)은 높은 편이다. 10점 만점에 평균 7.55점. 등단 시기를 밝힌 이들만 보면, 1990년 이전 등단자(17명) 7.53점, 1991~2000년(14명) 8.07점, 2001~2010년(17명) 8.0점, 2011~2021년(21명) 7.24점이었다. 세대를 아울러 전체 58명이 7점 이상을 부여했다.



왜일까.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시인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쳤”으나 “시가 인생에 찾아와 주어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므로” 나아가 “시의 진정성과 진실성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메아리가 될 수 있겠다 믿어서” “적어도 덜 부끄럽고 싶어서” 많은 이들은 “시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한 답변)고 ‘한때’를 회고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중의 말이, 시대의 말이 무엇이든 “단, 하루도 시 쓰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시인이 되고 싶었을 때부터 시를 쓰지 않은 해는 없었다” “40여년간 단 한 번도 시 쓰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말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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