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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김 장관님, ‘손긔졍’ 사인하고 금강산 그렸던 그가 일본 국적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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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왼쪽)과 1936년 베를린올림픽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는 손기정. 연합뉴스, 손기정 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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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다고 하면 손기정 선수도 잘못된 겁니까?”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선조들이 충성해서 지켜야 할 조국은 일본이냐’는 이재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이렇게 되물었다.



‘일제시대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손기정(1912~2002)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자체를 원천 무효라고 보는 정부 공식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만, 김 장관은 이날도 “일제시대 때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다고 해서 매국노가 아니고 애국자”라며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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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 당시 반환점을 도는 손기정 선수(오른쪽)와 어니스트 하퍼. 손기정 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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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일제시대 손기정 국적은 일본”…당사자 생각은 전혀 달라





‘일제강점기 손기정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김 장관의 호언이 무색하게도 당사자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당시 손기정은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며 한국인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3일 손기정 기념관 누리집을 보면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들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선수촌에 머물던 그는 여러 번 사인 요청을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서슴없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이름을 쓰고 이와 함께 영문으로 ‘KOREA’라고 적었다고 한다.



때로 한반도기를 함께 그려 넣기도 했다. 한 일본 팬이 후지산을 그려달라고 해도 손기정은 금강산을 그려줬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항상 같았다고 한다. “코리아에서 왔다.”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참가 전후를 취재한 미국 작가 리처드 만델은 자신의 책 ‘나치 올림픽에서 “손은 사실 한국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민족독립주의자였다”며 “그의 조국은 1910년 일본에 합병당했으며 그가 국제적으로 이기는 방법이란 그 가슴에 증오의 상징인 일장기를 달고 뛰는 것이었다. 올림픽 시상식 때 손기정과 남승룡은 기자들에게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이해시키려 했다”고 썼다.



손기정의 가슴팍에 붙여진 일장기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미국의 마라톤 선수로 손기정과 우정을 나눈 존 켈리도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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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올림픽 결승선 통과 사진. 손기정 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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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일장기 가려…“태극기 처음 본 뒤 뜨거운 감격”





손기정은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됐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시상대에 오른 그는 부상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렸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기미가요(일본국가)를 들었다.



“손기정은 일본 깃발 아래 출전하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는 것을 불행으로 여겼다”는 스포츠 다큐멘터리 감독 버드 그린스팬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 시상대에 같이 올랐던 남승룡은 훗날 일장기를 가릴 월계수 묘목이 없어 손기정이 부러웠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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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료사진


일본 언론들이 국제전화를 걸어 수상소감을 물었을 때도 손기정은 “이렇다 할 느낌은 따로 없다. 감격했을 뿐”이라며 감정 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조선일보 도쿄지국에서 걸려온 동포의 전화에는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수화기를 쥔 손기정은 목 놓아 울었고, 수화기로 들려오는 손기정의 통곡을 들은 기자도 감정이 복받쳐 목이 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손기정은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일본 선수단 본부가 시상식 뒤 연 축하파티에는 불참하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의 자택을 찾았을 정도였다. 손기정은 당시 안봉근의 서재에서 태극기를 처음 봤다고 한다.



손기정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감전이 된 듯 뜨거운 감격이 몸에 흘렀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이렇게 숨 쉬고 있듯이 우리 민족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우러났다”고 회고했다.





일제, 손기정 환영회도 못 열게 해





일본은 그런 손기정을 못마땅해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도쿄로 귀국한 두 선수의 환영회도 못 열게 했다. 이들의 올림픽 우승이 독립 열기를 고취해 집단행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1936년 발간된 일본 특별고등경찰 기관지 ‘특고월보’ 10월호에는 당시 일본의 인식을 보여주는 정황이 자세히 담겼다. 특고월보는 “독일 체류 중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KOREA(고려) 손기정’이라고 쓰는 등 불온한 행동을 했다”, “민족주의 운동은 두 선수 귀국을 계기로 상당히 고조된 형세다”, “이때 조선인만의 환영회와 위안회 등의 개최를 허가한다면 민족적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과 조선인 간 대립 기운을 키울 수 있다”고 썼었다.



심우삼 기자 wu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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