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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전국 7위 ‘지역 대표’ 백화점, 명성 잃고 이젠 식당가 전락 [심층기획-존폐기로 선 향토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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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급감으로 경영난에 허덕

‘지역소멸 시계’ 갈수록 빨라져

정책·인프라 지원 등 대안 절실

80년 역사 대구百 8년 연속 영업손실

본점·아울렛·물류센터 공개매각 나서

신세계百 등 ‘유통 공룡’ 시장 잠식 원인

선양소주·대선주조 등 지역 5개 업체

하이트·롯데 등 공격적 마케팅에 밀려

영업이익 53% 급감… 길거리 홍보 나서

“급격한 인구 감소·지방소멸 위기감도”

“밥 먹으러 가죠, 누가 쇼핑하러 대백(대구백화점) 가나요?”

3일 방문한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있는 대구백화점 프라자점은 과거 향토 백화점 1위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창 매출을 올려야 할 한낮인데도 지하1층 식품 매장을 찾은 주변 회사원들과 아파트단지 주민들이 눈에 띄었을 뿐 여성의류와 남성의류, 아동복 매장 등에선 손님이 층마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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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백화점 프라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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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만난 이만재(55)씨는 “요즘 우리도 그렇고,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옷은 온라인으로 사다 보니 백화점을 가지 않는다”며 “그나마 신세계백화점은 명품 매장이라도 있지, 대구백화점은 가끔 지인들과 식당가를 찾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과거 지역민의 사랑을 받고 지방 발전에도 기여하던 향토 기업들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막강한 자본력 등을 기반으로 시장을 잠식한 대기업에 치이고 지속된 인력 유출로 인력 확보와 판로 개척, 자금 조달 등 경영 활동 전반에서 어려움을 겪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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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기업 몰락은 지역 인재 이탈과 지방 소멸 속도를 높일 수 있어 정책·인프라 지원 등의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지방의 새로운 기회 창출을 목표로 각종 특구를 지정해 육성 중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날 찾은 대구백화점은 현재 유동성 확보를 위해 본점과 아울렛, 물류센터 공개 매각에 나선 상태다. 대구백화점은 대전의 세이백화점, 광주의 화니백화점 등 지역 유통가를 주름잡던 향토 백화점들이 모두 무너진 뒤에도 올해까지 80년 역사를 자랑하며 생존한 유일한 백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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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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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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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백화점 프라자점은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백화점에 쉽게 매장을 내주지 않는 루이비통과 까르띠에를 비롯해 구찌, 버버리 등 명품 브랜드들이 앞다퉈 입점하며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고급 백화점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이 백화점은 2016년부터 8년 연속 연결 기준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지난 7월 23년간 장기보유 중이던 현대홈쇼핑 주식 38만2600주를 178억원에 전량 매각했지만 손실을 메꿀 수 없었다. 이에 최근엔 대구 동성로 본점과 대구 동구 신천동 구 대백아울렛, 동구 신서동에 있는 물류센터 3곳에 대한 매각에 나섰다.

대구백화점 관계자는 “프라자점의 정상화와 향후 수익구조 개선을 위해 이번 자산매각이라는 결정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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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시장 잠식에 규제까지 지방기업 옥죄

1999년 지방 백화점 최초로 단일 점포 연매출 3000억원을 돌파하며 전국 7위를 기록했던 대구백화점이 위기에 처한 배경에는 신세계백화점 등 ‘유통 공룡’의 지역 상권 진출이 자리 잡고 있다. 2016년 신세계백화점이 동대구역사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상 첫 적자를 기록한 대구백화점은 2019년 결국 본점 폐업을 결정했다. 2002년 연매출 6900억원을 자랑했던 대구백화점은 이 시기 매년 200억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신세계백화점 동대구점은 지난해 1조4982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전국 7위 규모 백화점으로 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급변한 유통구조도 악재였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쇼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한 라이브커머스가 대세가 됐고 유통기업들은 앞다퉈 플랫폼 개발에 주력했지만 대구백화점 등 지방 유통기업들은 이 같은 변화에 편승하지 못했다. 그럴 자금력이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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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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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전통시장 위주에서 지역 전체 상권으로 지역 상권 활성화 정책을 확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대구백화점 프라자점 개점과 함께 상권이 형성된 대봉동 웨딩거리 상권의 경우 백화점 방문객이 줄면서 덩달아 위축됐다.

대구지역의 부동산 한 관계자는 “대구백화점 프라자점 유동인구를 통해 먹고살던 웨딩거리나 상권이 백화점 손님이 줄어들면서 함께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날 둘러본 대구백화점 프라점 뒤편 웨딩거리 상가 1층에 ‘임대’라고 써 붙인 공실이 즐비했다.

규제 탓에 지역 기업 몰락이 가속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구백화점 프라자점은 2020년 보유하고 있던 약 2800평 야외주차장 부지를 상업시설 등으로 개발하려 했으나 토지 용도변경이 되지 않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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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주류업체인 선양소주 임직원들이 지난달 28일 대전시청 인근 거리에서 '지역소주 사랑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선양소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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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나선 지방 소주사 직원들도

이 같은 상황은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전·충남에선 지역 대표 소주 제조사 선양소주가 위기에 처했다. 최근 이 회사 직원들은 대기업 소주 회사의 융단폭격식 광고마케팅으로 매출이 급감해 경영 위기에 처했다며 길거리 홍보에 나섰다. 심각한 현실을 지역 소비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다. 선양소주는 과거 지역민들의 사랑으로 대전 지역 소주 시장 내 60% 이상의 점유율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주류소비 감소 및 국내 대기업 소주 회사의 융단폭격 광고마케팅으로 인해 지역 내 30% 수준까지 점유율이 하락했다.

선양소주 관계자는 “지역사회와 상생·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의 융단폭격 광고마케팅 물량 공세에 맞대응하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규식 선양소주 사장은 “대기업의 광고마케팅 물량 공세로 우리 회사를 비롯해 전국의 지역 소주 회사들이 모두 어려운 상황”이라며 “지난 51년간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지역 소주에 다시 한 번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대구·경북 지역민들에게 ‘참소주’로 사랑받던 금복주는 지난해 영업이익은 2억7000만원이다. 웬만한 유명 식당보다 작은 이익액이라 시장에 충격을 줬다. 이는 또 전년(64억3000만원) 대비 95.7% 급감한 금액이다. 참소주 판매량은 전년 대비 7% 주는 데 그쳤다. 대기업 소주에 맞서기 위해 금복주로서는 막대한 판촉비를 지출하는 바람에 영업이익이 급감한 것이다.

지역 소주 업체들의 실적은 이렇게 지속 악화 추세다. 금복주, 무학, 보해양조, 대선주조, 선양소주 등 지역 5개 주류 업체의 지난해 총매출액은 3998억원으로 전년도 4146억원 대비 3.6% 줄었고, 영업이익은 53.3% 급감했다. 대기업이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TV, 신문광고, SNS로까지 다방면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가면서 젊은 소비자들이 지역 소주보다는 이들 제품을 더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소주 시장에서 하이트진로의 점유율은 59.7%, 롯데칠성음료는 18%로 대기업이 전체 시장의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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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찾은 대구 중구 대구백화점 프라자점 7층 남성의류·골프 매장이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 한때 서울의 백화점 본점과 단일 점포 매출 수위를 다퉜던 대구백화점은 최근 지속한 경영실적 악화로 본점과 아울렛, 물류센터 등 핵심 자산 매각에 나섰다. 대구=김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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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인 위기는 지방소멸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지방소멸은 지방기업과 산업 생태계를 붕괴시킬 최대 위기로 꼽힌다. 실제 지방 기업은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상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2022년 대한상공회의소가 수도권 이외 지역 소재 기업 513개를 대상으로 한 ‘지역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 결과를 보면 응답 기업의 68.4%가 ‘지방소멸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고 답했다. 지방 소재 기업이 지방소멸 위협을 느끼는 것은 급격한 인구 감소세와 함께 지역 간 불균형 심화에 따른 불안감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대한상의는 “역대 정부가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지방 기업들이 느끼는 불균형은 심화하고 있다”며 “지방 기업의 불안감과 실질적 피해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역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방소멸로 인한 소비자 감소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을 버티고 있는 지역 기업들이 당장은 대기업 공세를 근근이 버텨내겠지만 주민이 다 떠나면 진짜 벼랑 끝에 몰리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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