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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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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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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
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
미래?

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

오늘도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는데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

-시 ‘노동의 미래’,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


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처지도록 굵직한 고추를 달고 있어야 할 고춧대에 따야 할 고추보다 떼어내 버려야 할 고추가 더 많다. 빨갛게 익어가다 물컹해진 고추와 익지도 못한 채 하얗게 타버린 애들은 또 어쩌나. 제아무리 매운 고추라도 번갈아 들이닥치는 땡볕과 폭우를 고스란히 버텨야 했으니 온전하게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게 염치없는 짓 아닌가.

보름 전,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기사가 땡볕에서 죽었다. 토하고 헛소리하고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등 열사병 증상을 보이는데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받아보지 못한 채. “오늘도 죽고 있”다. “매일 죽고 있”다. 뭐 하다? 일하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다. 누가?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등 각자의 이름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던 장미들이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다. 죽어라 일하다 진짜로 죽어버리고 있다. 누가? 고장 난 신호등처럼 아무리 일해도 붉은 불만 켜진 경제를 떠안고 사는 자들이 “오늘도 죽고” “매일 죽고 있”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이 구호는 생존권만이 아니라 장미로 비유되는 인간다운 삶을 요구한단 의미다. 1912년 미국 로런스 파업에서 외쳤던 빵과 장미는 100년도 더 지난 오늘도 유효하다. 유통기한이 무한한 소망이나 비원처럼 갈수록 더 신선하다. 죽자 사자 달리다 거리에서 죽고 알아서 기고 쥐어짜다 진짜로 죽어버리는 나라에서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빵과 장미’에서 노래한 시구를 떠올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녀들이 부르던 빵의 노래”를. 허드렛일에 지쳐 “정신은 예술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거의 알지 못했”던 자들의 노래를. “맞다,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를 얻기 위해 싸운다”.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는 세계에는 비상구가 없다. 31명의 사상자를 낸 아리셀 공장처럼. 불이 나자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현장에 갇힌 채 죽어간 노동자들처럼. 비상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비정규직처럼. 출입카드를 받은 정규직만 열 수 있는 비상구와, 사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열리도록 설계된 문이 있는 한 노동에 미래가 있는가. 누군가 비상구로 나가자고 하지 않는다면. 손잡고 화급히 함께 달려가지 않는다면.

경향신문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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