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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사유와 성찰]옹두리가 전해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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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익숙하던 세계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명료하다 여기던 것들이 모호해지고, 가깝다 생각하던 것들이 멀어지고, 질서정연하다 여기던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 같고, 든든하다 여기던 것들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 나 홀로 세상에서 단절된 것 같은 느낌에 아뜩해진다. 부조리의 경험이다. 예기치 않은 죽음과 맞닥뜨릴 때가 특히 그러하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 일상의 흐름을 폭력적으로 단절시킨다. 단절은 고립이다. 세상이 부빙처럼 멀어져 갈 때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죽음과의 불쾌한 대면을 애써 연기하거나 피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의 자각은 우리 삶을 근원에서 돌아보라는 일종의 초대이다.

영혼의 창에 드리운 어둠은 우리 삶의 부박함을 돌아보게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고속열차를 타고 질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우리를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이 무한히 신비한 세계에 속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선물임을 자각하게 된다. 죽음과의 대면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물론 폭력적 방식으로 삶에서 단절된 이들의 존재는 분노를 자아낸다. 억울한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로 남는다. 먹고, 입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죄스럽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그 그림자를 마치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림자를 새로운 삶의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숲길을 걷다보면 가끔 커다란 혹을 달고 있는 나무가 눈에 띈다. 병들거나 벌레 먹은 자리에 맺힌 결인 혹은 나무가 겪어온 풍상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옹두리를 볼 때마다 상처를 딛고 상승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나무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나무는 누구를 탓하지도 않고 비애조차 내비치지 않으며 홀로 그 상처를 치유한다. 생명이 하는 일이다. 생명은 그래서 장엄하다. 아무리 삶이 곤고해도 내색하지 않고 검질기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통해 세상에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박사가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청계천이 피란민들 거주지였던 1950년대 말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걸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정진홍 박사는 그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한다. 먹감나무가 제 몸의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빚어내듯 삶이 제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여낙낙한 태도를 잃지 않고, 상처를 속으로 삭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삶의 예술가들이다.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음울한 목소리로 묻는 이들이 있다. 욕망의 문법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질주하다 보니 숨은 가빠지고, 어느 순간 외로움과 상실감에 확고히 사로잡혔지만, 그렇다고 하여 멈추어 설 수도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비명이다. 희망을 자기 외부 어딘가에서 찾으려는 이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월이지만 비애에 침윤되지 않고 듬쑥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는 이들은 거룩하다.

경향신문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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