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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정동칼럼]법관의 ‘헌법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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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없다는 세간의 한탄 속에 정치적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사법 결정들이 아쉬운 대로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 재구성해보았던 ‘방통위 사태’는 행정법원에서 방문진 이사 임명처분에 대한 효력정지 결정이 내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의적 인사권 행사로 초래된 방통위 2인 체제에서의 처분이 위법의 합리적 의심을 받은 결과다. ‘비정상적’ 공권력 행사가 확인됨으로써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방송장악’을 도모하려는 대통령의 무도한 구상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하급법원이 ‘일개’ 단체의 임원 선임에 대해 내린 잠정적 결정이지만 방송을 둘러싼 정치권력의 충돌 상황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헌법적 의미가 적지 않다.

한편 헌재는 미래세대에게 과도하게 부당한 부담을 전가할 수 있는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를 2030년까지만 정하고 그 이후 2050년까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량적 기준도 제시하지 않아 온실가스 감축효과를 담보할 수 없는 법률조항의 위헌성을 확인한 것이다. 그동안 정치영역으로 간주되어온 탄소중립 정책에도 사법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헌법적 의미가 크다.

흔히 법을 해석하고 사건에 적용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사법은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법을 담당하는 재판기관을 정치를 담당하는 입법권이나 행정권으로부터 독립시킨 사법독립의 관점에서 사법은 당연히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분립이나 법치주의에 따른 ‘탈정치’는 사법독립의 필요조건일 뿐 그 본질은 아니다. 사법작용의 대상인 법이 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헌법에 의한 정치’를 추구하는 민주공화국에서 법은 하늘에서 떨어진 신탁(神託)의 산물이 아니고 주권자 국민이 민주적 대의과정을 거쳐 결정한 규범이다. 따라서 입법목적이라는 정치적 의도나 그에 따라 정치적으로 결정된 구체적 정책과 제도를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가치판단과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정치적 가치판단을 다루는 방법이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법의 문언이나 체계는 물론 판례, 즉 해당 법에 대한 이전의 해석관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한계가 있을 뿐이다.

사법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법관에게 전문성을 가진 법률가의 자격을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사법에 고유한 법 해석과 적용의 전문성, 즉 ‘법적 사고’의 특수성에 있다. 그런데 법관에게 법적 사고의 전문성이나 특수성을 강조하다보면 역설적으로 원래 법관이 해석하고 다루는 법이 정치적 산물이고 사법 결정 또한 정치적 가치판단이 ‘일정부분’ 필요하다는 전제를 소홀히 하기 쉽다. 나아가 법관이 가지는 사법권이 민주공화국 헌정 체계에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헌법적 가치 또한 놓치기 쉽다. 독립된 사법권과 그를 실행하는 법관의 헌법적 역할은 ‘국민의 법관’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민주공화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헌법적 책무를 가진다. 혹여나 담당하는 재판에서 구체적인 법률관계를 다룰 때 적용되는 법이 가지는 헌법상 권력관계의 실상을 소홀히 하게 될 때 국민의 법인식과 동떨어진 엉뚱한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방통위 2인체제가 감행한 처분의 위법성은 오로지 방문진 이사 임명의 경우에만 미치고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진 KBS 이사 선임은 현재 사법통제 없이 집행되고 있다. 이는 사법이 정치적 효과를 가지는 결정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개별 사건에만 국한되는 구조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헌재의 기후정의에 대한 결정 또한 2030년까지 설정된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 계획과 부문별 및 연도별 감축목표는 합헌으로 선언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부문별 및 연도별 감축목표는 다수인 5인 재판관이 위헌의견이었지만 소수 4인의 합헌의견 때문에 위헌정족수에 미달하여 위헌으로 선언되지 못해 정치영역에 대한 사법통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정치와 사법이 너무 가까워져도 멀어져도 안 된다는 헌법원리 차원에서 보면 사법이 정치를 만나게 될 때 기본권과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이 정치를 통제하도록 부여한 헌법적 소명에 충실하려는 법관의 역할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정치가 상실된 2024년의 대한민국엔 그 어느 때보다 법관들에게 ‘국민의 법관’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절박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경향신문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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